[열린세상] 황장엽과 김용순

[열린세상] 황장엽과 김용순

김근식 기자 기자
입력 2003-11-04 00:00
수정 2003-11-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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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7일 북한의 대남담당 비서 김용순이 사망했다는 공식 부고가 있었다.그리고 같은 날 북한의 국제담당 비서였던 황장엽씨가 논란 끝에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한때 북한 최고지도층에 함께 몸담았던 두 사람이 서로 엇갈린 인생을 극적으로 보여준 셈이다.

알다시피 황장엽 전 비서는 북한의 대표적인 사상이론가로서 주체사상의 체계화에 깊이 관여했고 주체사상의 철학적 원리를 사실상 완성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젊은 나이에 김일성대학 총장을 역임했고,1970년대에 주체사상 이론화 작업을 주도한 이후 당 사상담당 비서와 국제담당 비서를 거쳐 1997년에 남쪽으로 망명했다.

김용순 비서 역시 일찍부터 대외관계 부문에서 당 사업을 시작,당 국제부장과 국제담당 비서를 역임하다가 1990년대부터 대남담당 비서 역할을 맡아왔다.특히 2000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실무를 챙기면서 김정일 위원장 곁을 떠나지 않던 김용순 비서의 모습은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황장엽씨와 김용순 비서의 상이한 인생 궤적에 대해 아직 나이어린 필자가 가타부타평가할 수 있는 계제는 아닌 듯싶다.그러나 두 사람의 삶이 우리의 대북정책 방향과 관련하여 상충되는 상징성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필자에게 또 한번의 진지한 고민은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황장엽씨는 북한 붕괴를 위해 대북 압박의 정당성을 설파하는 대표적인 논객이다.남쪽으로 망명 이후 황장엽씨는 줄곧 김정일 정권의 부도덕성을 강조했고,북한체제의 근본변화를 위해서는 북한에 대한 강력한 압박과 봉쇄 외에 다른 길은 없다고 주장했다.특히 북한의 핵문제에 대해서도 그들과 절대 협상하거나 양보해서는 안되며 오히려 전쟁을 두려워하지 말고 스스로 붕괴하도록 고사작전을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결국 황장엽씨는 일관된 봉쇄전략을 통해 북한 스스로 내파(內破)하도록 해야 한다는 ‘북한 붕괴론’과 ‘대북 봉쇄론’의 상징인 것이다.

이와 반대로 김용순 비서는 북한이 대외관계의 개선을 통해 스스로 변화의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다는 강력한 의지의 인물이었다.1992년에는 미국을 방문해 아놀드 켄터 미 국무부 차관과 회담을 갖고 당시 교착상태에 놓여 있던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핵사찰 문제를 타결짓기도 했다.2000년 남북정상회담 성사과정과 이후 남북관계의 개선과 화해협력의 발전과정에 김용순 비서가 핵심적인 역할을 했음은 다 알려진 사실이기도 하다.김용순 비서는,북한이 대외관계 개선을 통해 나름의 변화를 추구한다는 지금,북한 지도부의 입장을 가장 상징적으로 대변하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본다면 지금 우리에게 김용순 비서와 황장엽 전 비서의 엇갈린 인생은 북한 붕괴론과 대북 봉쇄론 그리고 북한 변화론과 화해협력의 남북관계 중 어느 것이 보다 정당한 것인지를 상징적으로 고민케 하고 있다.황장엽씨로 대표되는 북한 붕괴론에 따른다면 지금이라도 화해의 남북관계는 걷어치우고 대북 봉쇄와 압박을 가속화해서 북한 스스로 붕괴하도록 도와야 할 것이고,김용순 비서로 대표되는 북한 변화론에 따른다면 화해와 협력의 남북관계를 더욱 발전시켜 북한이 스스로 변화하도록 유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황장엽씨의 북한 붕괴론은 1990년대 이후 체제위기를 겪으면서도 ‘그럭저럭 버티기’에 성공한 북한의 내구력을 과소평가하고 있다는 비판에 직면하고 있다.또한 대북 압박이 북한의 내적 통합에 기여하고 남북관계 경색과 한반도 긴장을 고조시킴으로써 북한 스스로의 변화 가능성과 이에 따른 점진적 평화통일을 불가능하게 한다는 비판도 존재한다.북핵문제에서도 미국이 주도하는 대북 강경기조를 정당화할 뿐 한반도의 평화에 기여하는 문제해결을 가로막고 있다는 평가다.

방미를 반대하는 시위대를 피해 예정보다 하루 앞당겨 미국행 비행기를 탄 황장엽씨의 현실과 남한 정부 인사가 공식적으로 김용순 비서에게 인간적 조의를 표시하는 지금의 모습에서 북한 붕괴론과 북한 변화론 중 우리가 어떤 전략을 선택해야 할지는 조금씩 자명해지고 있는 것 같다.황장엽씨로 상징되는 북한 붕괴론이 우리의 입장에서 가능하지도,바람직하지도 않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응당 황장엽류의 대북관은 폐기되어야 한다.

김 근 식 경남대 극동문제硏교수 정치학
2003-11-04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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