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m 높이의 팽팽한 줄 위로 한발 한발 내딛는다.이내 얼음을 지치듯 한가운데로 나가 부채를 펼치며 몸을 솟구친다.위아래로 출렁거리는 줄을 타며 동작은 더욱 현란해진다.줄광대는 갑자기 소리와 재담을 섞어가며 갖가지 잔재주를 부린다.숨죽이고 지켜보던 구경꾼들은 어느새 신명나는 줄박자에 빠져든다.
른 셋이라는 나이에 최연소 중요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일명 인간문화재)가 된 김대균(37·경기 안성시 죽산면 매산리)씨.사람들은 그를 이 시대의 마지막 ‘줄광대’로 부른다.하지만 20여년 동안 스무 걸음 남짓한 줄 위를 걸어 온 ‘외줄인생’의 서러움이 싫어 고단한 여행이지만 함께 나설 길동무를 찾고 싶어한다.
“스승님의 그늘없이 홀로 줄타기 원형을 보존하고 지켜내는 일은 마치 1300년 세월의 무게로 다가오는 그런 압박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줄 위에 오르는 단 한 가지 이유는 천년의 맥을 이어온 위대한 예술,우리 고전 줄타기의 화려한 부흥을 꿈꾸기 때문이다.그 밑거름은 ‘줄타기의 대중화’에서 비롯된다는 신념을 갖고 안성의시골마을에서 첫발을 내딛으려 한다.바로 예비 줄광대들을 키우는 터전을 그 곳에 마련하는 것이다.
‘줄타기 판줄’은 줄광대가 두 길 높이의 공중에 매단 줄 위에서 삼현육각의 반주에 맞춰 재담을 하고 춤도 추며 잔재주를 보여주는 연희예술.곡예만 보여주는 서양의 서커스와는 다르다.조선조 말까지만 해도 임금님 앞에서 공연했을 정도로 마당놀이의 꽃이었다.일제의 문화말살 정책에 의해 수많은 명인들이 사라졌지만,줄타기 판줄은 조선 영조 때 명인인 김상봉 이래 최상천·김관보에 이어 스승인 김영철에서 김씨로 이어지는 계보를 갖고 있다.
“우리 선조들은 옛 것,자기 것만 고집하려는 올곧은 성격이 너무 강했어요.기술은 서로 공유해야 장점을 살리고 단점을 보완해서 더욱 발전시킬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처음 줄을 만났을 때만 해도 외로움을 아는 사람만이 제대로 줄을 타는 것으로 여겼다.그래서인지 배우겠다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아 50여년의 긴 세대간 공백이 생겼다.
“제게 기술을 전수해준 스승님이 살아계신다면 80세가 되는데40∼60대 전수자 없이 곧 바로 저한테 넘어왔습니다.”
자신이 포기하면 이땅에 전통 ‘판줄’이 사라질 것이라는 막연한 불안감이 마음을 급하게 만들었을까? 공연이 없는 날이면 후원회나 문화재 관계자들을 만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2000여평 규모의 땅을 확보해 그 곳에 줄타기 놀이마당과 전수관을 짓겠다는 것이다.안성시가 관심을 보이고 있어 “일이 잘 될 것같다.”며 기대에 부풀어 있다.그 곳을 아이들 놀이마당으로 개방하고,줄타기체험 프로그램을 마련해 보다 많은 전수자들을 키우고 싶어한다.나아가 초등학교와 중학교 1곳씩을 ‘줄타기 지정학교’로 선정해 예비 줄광대들이 예술고등학교를 거쳐 대학에 진학할 수 있게 하는 계획도 세웠다.
발을 굽히고 한발을 줄밑으로 늘어뜨리는 외홍잽이.몸을 날려 돌아 앉는 거중틀기.외발을 꿇고 오른발을 세우는 무릎꿇기 등 아슬아슬한 장면을 연출하면서도 입으로는 연신 걸쭉한 재담을 쏟아낸다.
김씨는 1967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났다.아홉살 되던 해 판소리와 북을 다루며 예인의 길을 꿈꾸던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용인으로 올라왔다.아버지가 일하던 용인민속촌에 자주 놀러갔다가 그곳에서 줄을 타며 후계자를 찾고 있던 김영철 선생(1920∼1988)의 눈에 띄어 줄 위에 올려진다.이후 15세 때 처녀공연을 가졌으며,87년 20세 때 줄타기 전 과정을 이수한 전수조교 자리에 올랐다.
중요문형문화재로 선정되던 지난 2000년 7월,국내 모든 매스컴이 역대 최연소 인간문화재의 탄생을 앞다퉈 보도했다.그는 당시 “줄 위에 서있을 때의 어려움보다는 우리의 전통문화에 대한 사회의 무관심이 더 나를 외롭게 했다.”며 줄타기의 명맥을 꼭 잇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축제의 계절인 봄과 가을에는 전국의 지방자치단체와 놀이공원 등에서 공연 제의가 쇄도하는 바람에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란다.일년에 서너차례 준비되는 해외공연에도 나서야 한다.여름철인 요즘,가족과 오붓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지만 연습시간 말고는 집에 머물 때가 거의 없다.줄타기의 모든 것을 담은 책을 펴내기 위해 자료를 모으고 틈틈이 원고도 쓰고 있다.
줄타기보전회장도 맡고 있는 김씨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전통 향기를 느끼게 하고 싶어요.그럴려면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며 말을 맺었다.
안성 김병철기자 kbchul@
른 셋이라는 나이에 최연소 중요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일명 인간문화재)가 된 김대균(37·경기 안성시 죽산면 매산리)씨.사람들은 그를 이 시대의 마지막 ‘줄광대’로 부른다.하지만 20여년 동안 스무 걸음 남짓한 줄 위를 걸어 온 ‘외줄인생’의 서러움이 싫어 고단한 여행이지만 함께 나설 길동무를 찾고 싶어한다.
“스승님의 그늘없이 홀로 줄타기 원형을 보존하고 지켜내는 일은 마치 1300년 세월의 무게로 다가오는 그런 압박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줄 위에 오르는 단 한 가지 이유는 천년의 맥을 이어온 위대한 예술,우리 고전 줄타기의 화려한 부흥을 꿈꾸기 때문이다.그 밑거름은 ‘줄타기의 대중화’에서 비롯된다는 신념을 갖고 안성의시골마을에서 첫발을 내딛으려 한다.바로 예비 줄광대들을 키우는 터전을 그 곳에 마련하는 것이다.
‘줄타기 판줄’은 줄광대가 두 길 높이의 공중에 매단 줄 위에서 삼현육각의 반주에 맞춰 재담을 하고 춤도 추며 잔재주를 보여주는 연희예술.곡예만 보여주는 서양의 서커스와는 다르다.조선조 말까지만 해도 임금님 앞에서 공연했을 정도로 마당놀이의 꽃이었다.일제의 문화말살 정책에 의해 수많은 명인들이 사라졌지만,줄타기 판줄은 조선 영조 때 명인인 김상봉 이래 최상천·김관보에 이어 스승인 김영철에서 김씨로 이어지는 계보를 갖고 있다.
“우리 선조들은 옛 것,자기 것만 고집하려는 올곧은 성격이 너무 강했어요.기술은 서로 공유해야 장점을 살리고 단점을 보완해서 더욱 발전시킬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처음 줄을 만났을 때만 해도 외로움을 아는 사람만이 제대로 줄을 타는 것으로 여겼다.그래서인지 배우겠다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아 50여년의 긴 세대간 공백이 생겼다.
“제게 기술을 전수해준 스승님이 살아계신다면 80세가 되는데40∼60대 전수자 없이 곧 바로 저한테 넘어왔습니다.”
자신이 포기하면 이땅에 전통 ‘판줄’이 사라질 것이라는 막연한 불안감이 마음을 급하게 만들었을까? 공연이 없는 날이면 후원회나 문화재 관계자들을 만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2000여평 규모의 땅을 확보해 그 곳에 줄타기 놀이마당과 전수관을 짓겠다는 것이다.안성시가 관심을 보이고 있어 “일이 잘 될 것같다.”며 기대에 부풀어 있다.그 곳을 아이들 놀이마당으로 개방하고,줄타기체험 프로그램을 마련해 보다 많은 전수자들을 키우고 싶어한다.나아가 초등학교와 중학교 1곳씩을 ‘줄타기 지정학교’로 선정해 예비 줄광대들이 예술고등학교를 거쳐 대학에 진학할 수 있게 하는 계획도 세웠다.
발을 굽히고 한발을 줄밑으로 늘어뜨리는 외홍잽이.몸을 날려 돌아 앉는 거중틀기.외발을 꿇고 오른발을 세우는 무릎꿇기 등 아슬아슬한 장면을 연출하면서도 입으로는 연신 걸쭉한 재담을 쏟아낸다.
김씨는 1967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났다.아홉살 되던 해 판소리와 북을 다루며 예인의 길을 꿈꾸던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용인으로 올라왔다.아버지가 일하던 용인민속촌에 자주 놀러갔다가 그곳에서 줄을 타며 후계자를 찾고 있던 김영철 선생(1920∼1988)의 눈에 띄어 줄 위에 올려진다.이후 15세 때 처녀공연을 가졌으며,87년 20세 때 줄타기 전 과정을 이수한 전수조교 자리에 올랐다.
중요문형문화재로 선정되던 지난 2000년 7월,국내 모든 매스컴이 역대 최연소 인간문화재의 탄생을 앞다퉈 보도했다.그는 당시 “줄 위에 서있을 때의 어려움보다는 우리의 전통문화에 대한 사회의 무관심이 더 나를 외롭게 했다.”며 줄타기의 명맥을 꼭 잇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축제의 계절인 봄과 가을에는 전국의 지방자치단체와 놀이공원 등에서 공연 제의가 쇄도하는 바람에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란다.일년에 서너차례 준비되는 해외공연에도 나서야 한다.여름철인 요즘,가족과 오붓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지만 연습시간 말고는 집에 머물 때가 거의 없다.줄타기의 모든 것을 담은 책을 펴내기 위해 자료를 모으고 틈틈이 원고도 쓰고 있다.
줄타기보전회장도 맡고 있는 김씨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전통 향기를 느끼게 하고 싶어요.그럴려면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며 말을 맺었다.
안성 김병철기자 kbchul@
2003-07-28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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