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학교 3학년 때인 46년 서울역에서 ‘내 잠깐 다녀올게.’라고 하시며 떠난 게 마지막이었죠.가족을 버리고 어떻게 떠날 수 있었을까 지금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카프(KAPF,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의 대표적 이론가로 활동하다 월북한 아버지 윤기정(1903∼?)을 생각하면, 전 아시아개발은행 수석전문위원 윤화진(67)박사의 가슴은 꽉 막혀온다.열살 이후 부르지 못한 아버지란 말은 그리움과 갈등으로 얼기설기 얽혀 있다.윤기정은 1925년 카프 초대국장을 지낸 뒤 계급문학으로서 목적의식을 강화한 1,2차 방향전환을 주도해 2차례나 투옥됐으며,광복 후 소설가 이기영 주도의 조선프롤레타리아문예동맹의 서기장으로 활동하다가 월북했다.이후 조소문화공동협력위원장 등을 지낸 뒤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버지 얘기 나오면 요즘도 소화안돼
분단의 상처로 신음하는 불구의 조국은 월북작가의 아들에게 한을 안겨주었다.“아버지 얘기만 나오면 요즘도 소화가 안 된다.”고 말할 정도로 그의 의식은 무겁다.그 때문에 대산문화재단과 민족문학작가회의 주관으로 24,25일 열리는 ‘탄생 100주년 문학인 기념문학제’에서 자신의 부친이 새롭게 조명받는 것과 관련한 인터뷰도 처음엔 한사코 거절했다.
힘들게 연 그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는 “드라마의 대상이 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근본적 치유보다는 몇몇 가족이 만나서 울고불고 하는 장면의 연출만으로 쓰라림을 달랠 수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50년 넘게 가족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정치논리의 희생양이 된 게 분하고 억울하다는 것이다. “피해자의 한 사람으로서 이 문제는 하나의 사회 캠페인 차원으로 승화해야 합니다.가족이었다는 이유로 인해 평생 가슴 졸여온 ‘고난의 연대’를 그 후손들에게는 되풀이되지 않도록 해야지요.말하자면 법적인 해방에서 나아가 심리적 자유까지도 보장해야 합니다.” 한번 트인 말꼬는 그동안 살아온 숱한 어려웠던 이야기로 이어졌다.34년 카프2차 검거 때 투옥돼 전주에서 출옥한 뒤 낳은 외동아들이 그였다.당연히 그에 대한 사랑은 남달랐다.그러나 그 내리사랑과는 별개로, 아버지는 자신의 사상적 자유와 이상을 위해 월북했다.
다행히 집안에는 재산이 많았다.“할아버지가 일찍 사금융에 눈을 떠 돈을 버셨고,어머니가 시집올 때 경기 파주 일대의 많은 땅을 갖고 오셨습니다.광복전 해마다 추수 때면 쌀을 가득 실은 소달구지 10여대가 집앞에 늘어섰던 기억이 납니다.” 이런 부 덕분에 아버지 윤기정을 비롯,카프의 맹원들이 일제의 감옥에 갇히면 변호사 비용을 댔다고 한다.또 박세영이나 송영 등이 자기 집으로 찾아와 기댈 수 있는 둥지가 되었다는 것이 윤씨의 기억이다.
그러나 광복 후 토지개혁으로 땅은 다 날아갔고 가재도구 등을 팔아가면서 살아갔다.윤씨는 어쩔 수 없이 소년가장이 되었고 안 해본 일이 없다.할아버지의 피를 이어 받았는지 이재에도 밝아 조부모는 “공부는 접고 장사를 해보라.”고 권유했다.
●‘가족만을 위해 살자’ 결심
윤씨가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경제적 어려움보다는 정신적 고통이었다.6·25 직전까지 1주에 한번 꼴로 급습해서 집안을 뒤지는 ‘권력의 감시’는 한창 자라나는 윤씨의 예민한 의식을 어두움으로 채색했다.
“굉장히 많던 책과 아버님 사진 등을 모두 불태웠어요.조부모님은 “너는 사상의 ‘사’자 근처에도 가지마라.”고 타일렀어요.” 그는 “가족만을 위해 살자.”고 결심했다.역사에 남을 인물은 못 되더라도 이데올로기 대립으로 인한 멍에를 가족들에게는 씌우지 않겠다고 독하게 다짐했다.
“그런 상황은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이해를 못한다.”는 윤씨가 잊지 못할 사건은 두가지.첫 사건은 그가 고교 3학년 때 아버지가 대남방송을 통해 안부를 물은 것.“북에 계신 아버지가 대남방송을 했어요.그 대응으로 육군정보국의 장교가 찾아와 ‘네가 대북방송으로 회답을 해야겠다.’고 말하더군요.집안에선 야단이 났지요.그래서 ‘지금 내 주위에선 아무도 아버지의 월북을 모르는데 그 사실이 알려지면 곤란하다.’고 했지요.천우신조일까요?이해심 깊어보이는 그 장교는 ‘열심히 살아라.’라며 돌아갔어요.지금도 그분께 감사하고 있어요.”
두번째 일은 유학과 관련돼 있다.윤씨는 62년 방한한 미국 경제학자 로스토의 서울대 강연을 듣다가 영어로 공격적인질문을 던지면서 벌인 논쟁이 계기가 돼 미국 정부 장학생으로 발탁된다.그러나 반공 이데올로기의 서슬이 시퍼런 시대에 월북작가의 아들에게 외국행을 허락할 리 만무였다.하지만 집안 사정을 잘 아는 고교 동창생이 마침 치안국 정보과 경위로 있어서 미국 길을 터주었다.
●잠재의식은 여전히 검열받는 중
우여곡절 끝에 64년 미국으로 건너가 예일대에서 학위를 받고 67년 귀국해서 연세대 강사,한국투자금융 심사담당관 생활을 지낸 뒤 68년 아시아개발은행 전문위원에 발탁,27년 동안 경제개발 전문가로 일했다.95년 귀국해 재벌그룹 고문,중견건설회사 회장을 지낸 뒤 지금은 미국계 벤처기업 대표이사로 일하고 있다.
그는 체험에서 우러나온 말로 인터뷰를 정리했다.“역경도 많았지만 열심히 노력한 결과,나름대로 만족도 하고 보람도 있었다.그러나 가족이나 친지의 일로 불이익을 받는 일은 문명국인 법치국가에서는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이제 법적인 불이익은 주지 않지만 당사자들의 잠재의식은 여전히 검열받는 ‘심리적 속박’에서 벗어나게 해주어야 한다.”고 말끝을 흐리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종수기자 vielee@
카프(KAPF,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의 대표적 이론가로 활동하다 월북한 아버지 윤기정(1903∼?)을 생각하면, 전 아시아개발은행 수석전문위원 윤화진(67)박사의 가슴은 꽉 막혀온다.열살 이후 부르지 못한 아버지란 말은 그리움과 갈등으로 얼기설기 얽혀 있다.윤기정은 1925년 카프 초대국장을 지낸 뒤 계급문학으로서 목적의식을 강화한 1,2차 방향전환을 주도해 2차례나 투옥됐으며,광복 후 소설가 이기영 주도의 조선프롤레타리아문예동맹의 서기장으로 활동하다가 월북했다.이후 조소문화공동협력위원장 등을 지낸 뒤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버지 얘기 나오면 요즘도 소화안돼
분단의 상처로 신음하는 불구의 조국은 월북작가의 아들에게 한을 안겨주었다.“아버지 얘기만 나오면 요즘도 소화가 안 된다.”고 말할 정도로 그의 의식은 무겁다.그 때문에 대산문화재단과 민족문학작가회의 주관으로 24,25일 열리는 ‘탄생 100주년 문학인 기념문학제’에서 자신의 부친이 새롭게 조명받는 것과 관련한 인터뷰도 처음엔 한사코 거절했다.
힘들게 연 그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는 “드라마의 대상이 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근본적 치유보다는 몇몇 가족이 만나서 울고불고 하는 장면의 연출만으로 쓰라림을 달랠 수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50년 넘게 가족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정치논리의 희생양이 된 게 분하고 억울하다는 것이다. “피해자의 한 사람으로서 이 문제는 하나의 사회 캠페인 차원으로 승화해야 합니다.가족이었다는 이유로 인해 평생 가슴 졸여온 ‘고난의 연대’를 그 후손들에게는 되풀이되지 않도록 해야지요.말하자면 법적인 해방에서 나아가 심리적 자유까지도 보장해야 합니다.” 한번 트인 말꼬는 그동안 살아온 숱한 어려웠던 이야기로 이어졌다.34년 카프2차 검거 때 투옥돼 전주에서 출옥한 뒤 낳은 외동아들이 그였다.당연히 그에 대한 사랑은 남달랐다.그러나 그 내리사랑과는 별개로, 아버지는 자신의 사상적 자유와 이상을 위해 월북했다.
다행히 집안에는 재산이 많았다.“할아버지가 일찍 사금융에 눈을 떠 돈을 버셨고,어머니가 시집올 때 경기 파주 일대의 많은 땅을 갖고 오셨습니다.광복전 해마다 추수 때면 쌀을 가득 실은 소달구지 10여대가 집앞에 늘어섰던 기억이 납니다.” 이런 부 덕분에 아버지 윤기정을 비롯,카프의 맹원들이 일제의 감옥에 갇히면 변호사 비용을 댔다고 한다.또 박세영이나 송영 등이 자기 집으로 찾아와 기댈 수 있는 둥지가 되었다는 것이 윤씨의 기억이다.
그러나 광복 후 토지개혁으로 땅은 다 날아갔고 가재도구 등을 팔아가면서 살아갔다.윤씨는 어쩔 수 없이 소년가장이 되었고 안 해본 일이 없다.할아버지의 피를 이어 받았는지 이재에도 밝아 조부모는 “공부는 접고 장사를 해보라.”고 권유했다.
●‘가족만을 위해 살자’ 결심
윤씨가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경제적 어려움보다는 정신적 고통이었다.6·25 직전까지 1주에 한번 꼴로 급습해서 집안을 뒤지는 ‘권력의 감시’는 한창 자라나는 윤씨의 예민한 의식을 어두움으로 채색했다.
“굉장히 많던 책과 아버님 사진 등을 모두 불태웠어요.조부모님은 “너는 사상의 ‘사’자 근처에도 가지마라.”고 타일렀어요.” 그는 “가족만을 위해 살자.”고 결심했다.역사에 남을 인물은 못 되더라도 이데올로기 대립으로 인한 멍에를 가족들에게는 씌우지 않겠다고 독하게 다짐했다.
“그런 상황은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이해를 못한다.”는 윤씨가 잊지 못할 사건은 두가지.첫 사건은 그가 고교 3학년 때 아버지가 대남방송을 통해 안부를 물은 것.“북에 계신 아버지가 대남방송을 했어요.그 대응으로 육군정보국의 장교가 찾아와 ‘네가 대북방송으로 회답을 해야겠다.’고 말하더군요.집안에선 야단이 났지요.그래서 ‘지금 내 주위에선 아무도 아버지의 월북을 모르는데 그 사실이 알려지면 곤란하다.’고 했지요.천우신조일까요?이해심 깊어보이는 그 장교는 ‘열심히 살아라.’라며 돌아갔어요.지금도 그분께 감사하고 있어요.”
두번째 일은 유학과 관련돼 있다.윤씨는 62년 방한한 미국 경제학자 로스토의 서울대 강연을 듣다가 영어로 공격적인질문을 던지면서 벌인 논쟁이 계기가 돼 미국 정부 장학생으로 발탁된다.그러나 반공 이데올로기의 서슬이 시퍼런 시대에 월북작가의 아들에게 외국행을 허락할 리 만무였다.하지만 집안 사정을 잘 아는 고교 동창생이 마침 치안국 정보과 경위로 있어서 미국 길을 터주었다.
●잠재의식은 여전히 검열받는 중
우여곡절 끝에 64년 미국으로 건너가 예일대에서 학위를 받고 67년 귀국해서 연세대 강사,한국투자금융 심사담당관 생활을 지낸 뒤 68년 아시아개발은행 전문위원에 발탁,27년 동안 경제개발 전문가로 일했다.95년 귀국해 재벌그룹 고문,중견건설회사 회장을 지낸 뒤 지금은 미국계 벤처기업 대표이사로 일하고 있다.
그는 체험에서 우러나온 말로 인터뷰를 정리했다.“역경도 많았지만 열심히 노력한 결과,나름대로 만족도 하고 보람도 있었다.그러나 가족이나 친지의 일로 불이익을 받는 일은 문명국인 법치국가에서는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이제 법적인 불이익은 주지 않지만 당사자들의 잠재의식은 여전히 검열받는 ‘심리적 속박’에서 벗어나게 해주어야 한다.”고 말끝을 흐리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종수기자 vielee@
2003-04-24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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