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로에 전국 각지의 여성들이 모여들었다.제주에서 익산에서 포항에서 무거운 짐들을 짊어지고 새벽차로 올라왔다.다시 밤차로 귀향하기까지 그 몇 시간동안 몸과 마음을 서로 얼싸안으면서 억눌렸던 목소리들을,생각들을,감성들을 토해냈다.지난 8일,19번째의 한국여성대회가 쏟아낸 한낮의 열기는 철 모르는 냉랭한 날씨를 마침내 봄날로 바꾸어내고 있었다.
새 정권이 조각을 하면서 여성장관이 몇 명이 될 것인지,지겨울 정도로 잡다한 말들이 오르내렸다.그 결과 과거에 비해 달라진 것은 여성부 외에도 여성의 몫이 두세 개 늘어난 것과 이것이 단순히 구색맞추기로 보이지는 않는다는 점이다.일단,일보 진전으로 받아들이자.
그런데 이런 일이 거꾸로 남성들에게 일어났다고 가정해보자.남성의 몫으로 확실하게 정해진 ‘남성부’외에 모든 장관은 여성들이 독차지하고,게다가 그 남성부라는 것이 무늬만 부(部)일 뿐 실속은 일 개 국(局)에도 못 미치는 것이라면? 그 알량한 자리를 두고 흡사 수많은 남성들이 줄을 서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 판국에 행여 남성이 다른 부서에 하나둘 끼어들까봐 온 나라가 신경을 곤두세우는가 하면,어쩌다가 이런 ‘파격’을 저지르는 정부는 온갖 생색을 낸다고 한다면? 남성들의 입에서는 ‘치사하고 굴욕적이다.’라는 말이 안 나올 수 없을 것이고,그런 나라를 어떻게 그냥 두고 볼 것인지 땅을 치고 분노할 것이다.그렇다면 여성들이 그렇게 분노하는 나날들을 보낸 그 세월은 과연 얼마나 되었을까?
사실 장관의 수 그 자체가 절대적 중요성을 갖는 것은 아니다.여성 장관이 하나도 없어도 여성들의 삶과 입장을 대변하는 정부와 국가가 존재한다면 분노할 필요까지는 없을지도 모른다.그런데 여성의 삶은 각 분야에서 각 계층계급 내에서 남성에 비해 항시 열등한 조건 속에 존재해 왔건만 이를 일차적인 국가과제로 다룬 적은 없었다.현재도 마찬가지이다.게다가 ‘여성’이라는 말이 특별히 첨가된 경우를 제외한 사회의 모든 분야는 마치 여성과 무관한 것처럼 간주되고,남성들이 그 모든 것을 주도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국사가 이루어져 왔다.
예컨대 국방은 정말 남성들만의 관심사일 수밖에 없는 것일까? 그동안 남성들이 주도해 온 전쟁과 ‘평화’의 역사 속에서 더 많은 고통을 당해야 했던 여성들이 과연 이 역사에서 무시될 수 있는 존재란 말인가? 여성은 고작 아들의 병역기피를 위해 밀거래를 주선한 주범처럼(?) 떠오를 때에만 국방과 관련된 존재라고 할 수 있을까?
여성들에게 국사를 맡길 때마다 되풀이되는 우려의 소리들 또한 지겹다.이 소리들은 암암리에 여성의 능력과 자질이 남성보다 뒤떨어질 것이라는 편견을 깔고 있다.이 때문에 사회는 남성보다 더 탁월한 능력을 입증해 보이는 여성들만을 합격수준으로 인정하고 싶어한다.이는 바로 이중차별이다.
여성비하의 편견은 우리사회가 어린 시절부터 남성에게 나라를 맡기고 여성은 그 보조적인 존재로 키워온 차별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다.그런데도 남성에게 감히 도전을 하는 여성이 있다면 남성의 능력을 능가할 만한 예외적인 경우에만 용납한다는 것인데,이는 선심을 쓰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차별이다.
여성의 잠재력을 잠재우는 것은 분명 나라의손실이다.그 잠재력이란 사회적 약자로서 ‘여성적’ 역할을 전담해온 독특한 경험과 시각,그리고 이로부터 습득한 자질을 말한다.이는 남성들이 독점해 온 국정의 한계를 극복하고 남성편향적인 사회의 틀을 질적으로 구조적으로 바꾸어내는 대안의 힘이 될 수 있다.그렇다면 “여성도 잘 할 수 있을까?”의 우려 대신에 ‘여성은 남성과 달리 무엇을 새롭게 잘 할 수 있는지’를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이번 내각에 합류한 여성들의 참 몫은 바로 그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에 있다.
이 영 자
새 정권이 조각을 하면서 여성장관이 몇 명이 될 것인지,지겨울 정도로 잡다한 말들이 오르내렸다.그 결과 과거에 비해 달라진 것은 여성부 외에도 여성의 몫이 두세 개 늘어난 것과 이것이 단순히 구색맞추기로 보이지는 않는다는 점이다.일단,일보 진전으로 받아들이자.
그런데 이런 일이 거꾸로 남성들에게 일어났다고 가정해보자.남성의 몫으로 확실하게 정해진 ‘남성부’외에 모든 장관은 여성들이 독차지하고,게다가 그 남성부라는 것이 무늬만 부(部)일 뿐 실속은 일 개 국(局)에도 못 미치는 것이라면? 그 알량한 자리를 두고 흡사 수많은 남성들이 줄을 서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 판국에 행여 남성이 다른 부서에 하나둘 끼어들까봐 온 나라가 신경을 곤두세우는가 하면,어쩌다가 이런 ‘파격’을 저지르는 정부는 온갖 생색을 낸다고 한다면? 남성들의 입에서는 ‘치사하고 굴욕적이다.’라는 말이 안 나올 수 없을 것이고,그런 나라를 어떻게 그냥 두고 볼 것인지 땅을 치고 분노할 것이다.그렇다면 여성들이 그렇게 분노하는 나날들을 보낸 그 세월은 과연 얼마나 되었을까?
사실 장관의 수 그 자체가 절대적 중요성을 갖는 것은 아니다.여성 장관이 하나도 없어도 여성들의 삶과 입장을 대변하는 정부와 국가가 존재한다면 분노할 필요까지는 없을지도 모른다.그런데 여성의 삶은 각 분야에서 각 계층계급 내에서 남성에 비해 항시 열등한 조건 속에 존재해 왔건만 이를 일차적인 국가과제로 다룬 적은 없었다.현재도 마찬가지이다.게다가 ‘여성’이라는 말이 특별히 첨가된 경우를 제외한 사회의 모든 분야는 마치 여성과 무관한 것처럼 간주되고,남성들이 그 모든 것을 주도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국사가 이루어져 왔다.
예컨대 국방은 정말 남성들만의 관심사일 수밖에 없는 것일까? 그동안 남성들이 주도해 온 전쟁과 ‘평화’의 역사 속에서 더 많은 고통을 당해야 했던 여성들이 과연 이 역사에서 무시될 수 있는 존재란 말인가? 여성은 고작 아들의 병역기피를 위해 밀거래를 주선한 주범처럼(?) 떠오를 때에만 국방과 관련된 존재라고 할 수 있을까?
여성들에게 국사를 맡길 때마다 되풀이되는 우려의 소리들 또한 지겹다.이 소리들은 암암리에 여성의 능력과 자질이 남성보다 뒤떨어질 것이라는 편견을 깔고 있다.이 때문에 사회는 남성보다 더 탁월한 능력을 입증해 보이는 여성들만을 합격수준으로 인정하고 싶어한다.이는 바로 이중차별이다.
여성비하의 편견은 우리사회가 어린 시절부터 남성에게 나라를 맡기고 여성은 그 보조적인 존재로 키워온 차별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다.그런데도 남성에게 감히 도전을 하는 여성이 있다면 남성의 능력을 능가할 만한 예외적인 경우에만 용납한다는 것인데,이는 선심을 쓰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차별이다.
여성의 잠재력을 잠재우는 것은 분명 나라의손실이다.그 잠재력이란 사회적 약자로서 ‘여성적’ 역할을 전담해온 독특한 경험과 시각,그리고 이로부터 습득한 자질을 말한다.이는 남성들이 독점해 온 국정의 한계를 극복하고 남성편향적인 사회의 틀을 질적으로 구조적으로 바꾸어내는 대안의 힘이 될 수 있다.그렇다면 “여성도 잘 할 수 있을까?”의 우려 대신에 ‘여성은 남성과 달리 무엇을 새롭게 잘 할 수 있는지’를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이번 내각에 합류한 여성들의 참 몫은 바로 그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에 있다.
이 영 자
2003-03-13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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