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람/’흰머리소년’ 원로 연극배우 권성덕

이사람/’흰머리소년’ 원로 연극배우 권성덕

입력 2003-03-04 00:00
수정 2003-03-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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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대학로 한 귀퉁이 허름한 건물의 4층 연습실.은발의 노배우가 연신 이마에 송골송골 맺히는 땀을 닦아내며 대사를 읊는다.차오르는 숨을 고르느라 간간이 맥이 끊기기도 한다.

“어휴,이렇게 힘든 역할은 이제 더이상 못할 것 같아.대사도 잘 외워지지 않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연습을 막 끝내고 너털웃음을 터트리는 그의 얼굴은 예순이 넘은 나이가 무색하게 해맑아 보였다.후배들이 붙여줬다는 ‘흰머리 소년’이란 별명이 괜한 말이 아니다 싶다.

배우 권성덕(63)씨.60년대부터 무대에 서기 시작해 40여년 넘게 우리 연극계를 굳건히 지켜온 대표적인 원로배우 중 한명이다.지난해 이해랑연극상을 수상한 기념으로 오는 12일부터 30일까지 학전블루소극장에서 ‘어느 노배우의 마지막 연기’ 공연을 준비 중이다.

“주인공은 악극단 출신으로 신극이 등장하면서 뒷전으로 밀려난 삼류배우예요.난 악극은 안했지만 선배들이 졸지에 ‘딴따라’‘광대’로 전락하며 괄시당하는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봤습니다.그때 생각이 자꾸 떠올라 더러 눈물도 납니다.”

칠순 가까운 나이에 허름한 단칸방에서 쓸쓸한 삶을 살아가는 주인공의 고단한 초상은 배우로서뿐만 아니라 누구나 노년에 겪을 수 있는 무력감과 좌절감을 담아낸다.남몰래 연정을 느끼는 김밥집 과부,외지에서 극단을 꾸리는 아들이 그의 마지막 희망이지만 그마저 여의치 않다.“연극을 떠나 노인 문제로서도 생각할 거리가 많은 작품”이라고 권씨는 설명했다.

이 작품은 최근 건강이 악화된 극작가 이근삼씨를 위해 이씨의 대학 제자인 연출가 고승일(61)씨와 권씨가 의기투합한 무대여서 더 의미가 있다.신파극 무대에서 작은 배역만 전전하다 배우인생을 마감한 주인공과 달리 권씨는 TV스타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내실있는 이력을 다져왔다.

중앙대 연극영화학과를 다니다 학비가 없어 중도에 그만두고 연극 무대에 데뷔했다.극단 광장을 시작으로,민중극단,극단 자유,극단 가교를 거쳐 70년대 초 국립극단에 들어가 ‘괴테의 파우스트’‘옛날 옛적 훠어이훠어이’ 등 수많은 작품에서 주인공으로 무대에 섰다.94년에는 국립극단장을 맡아 극단 발전을 위해 애썼으며,이듬해 국립극단을 나온 뒤로는 극단 유,서울시립극단 등에서 젊은 후배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이런 왕성한 활동에 힘입어 동아연극상,한국연극상,예총 예술문화상 등 숱한 연기상을 수상했다.하지만 예순이 다 될 때까지 변변한 아파트 하나 장만하지 못해 전셋집을 전전해야 했던 넉넉지 못한 살림살이만은 작품속 주인공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이번 공연에서 그는 1시간40분 내내 무대를 지켜야 한다.“이제 기력이 약해져 무대에 설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고 혼잣말을 하더니 금세 “배우에게 은퇴란 없어.몸이 움직이는 한 무대에 올라야지.”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한다.일주일에 한번씩 겸임교수로 있는 지방대에 내려가 학생들과 ‘놀다 오는’일이 즐겁다는 그는 자신을 불러주는 무대가 있는 한 언제라도 기쁜 마음으로 달려갈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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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녀기자 coral@
2003-03-04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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