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우리는 일제로부터 해방됐지만 뒤이은 국토분단으로 민족적 비원은 다시 시작됐다.해방 직전에 획정된‘북위 38도 분할선’,즉 소위 ‘38선’은 언제,누구에 의해,어떤 경위로 그어졌는가? 그동안 학계에서 통용돼온 정설은 1945년 8월 11일 새벽 2∼3시 사이의 30분간이라는 짧은 시간에 본스틸과 러스크라는 일개 미군 대령 두 사람이 미 펜타곤(국방성)에서 전혀준비없이 군사적 편의에 따라 그었다는 것이다.그러나 대륙과 해양세력이 교차하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특수성을 감안할 때 이같은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이같은 의혹은 마침내 한 소장학자의 집념에 의해 베일을벗게 됐다.
이완범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는 최근 ‘삼팔선 획정의비밀’(지식산업사)를 출간했다.이 책은 그가 지난 94년 국사편찬위원회 재직시 자료수집차 미국 내셔널아카이브(국립문서보관소)에 출장갔다가 소위 38선 획정지도(책 표지)를복사해 그동안 학계에서 정설로 인정해온 ‘러스크 증언’이 위증임을 증명한뒤 7년여의 확인작업 끝에 내놓은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38선을 그은 주인공으로 알려진 러스크는 이 지도를 보고 38선의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했는데 이지도에는 문제의 38선이 명기돼 있지 않았으며,35도선과 40도선만 그어져 있었다.다시말해 러스크가 이 지도를 보고 38도선 아래에 서울이 있었다는 것을 확신하기는 어려운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다른 지도를 활용했거나,아니면 누군가 이미 38선을 그은 것을 의도적으로 은폐하기 위해 뒤집어 쓴 것이라는 얘기가 된다.
38선 획정의 진실을 알아보기 위해 96년 그는 직장에 사표를 던지고 미국으로 향했다.그는 38선 획정지도가 한 장이아니라 3종류임을 확인하게 되었고,97년 6월 미 작전국장헐 중장의 증언기록 발굴을 통해 러스크는 이미 상부로부터 기안된 38선을 그려넣은 하수인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1945년 7월 25일경 포츠담에서미 작전국장 헐 중장과 전략정책단장 린컨 준장은 당시 번스 미 국무장관의 지시 아래 미·소간의 지상 작전분계선인 38선 근처의 이른바 ‘헐선(線)’을 획정한 것으로 나타났다.당초 미국은 한반도를 독점할 생각이었으나 소련의 참전으로 분할점령이 불가피하게 되자 부산·인천·원산 등 3개항 가운데 2개항(부산·인천)과 수도 서울을 포함하는 38도선으로 획정하게 된 것이다.당시 미국은 한반도가 신탁통치 이외에 미·소간 합의된 협정 없이 힘의 공백지대로 남게되자 소련의 독점을 우려한 나머지 1945년 8월 중순 한반도 분할을 서둘러 결정했다.본스틸과 러스크는 헐 중장과 그의 부하인 전략정책단장 린컨 소장에 의해 이미 결정된 38도선을 지도상에 그려넣은 데 불과한 것이다.
한국점령 계획은 일본의 패전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던 1944년부터 미 국무부에 의해 준비되었으며,1945년 2월부터는미 군부에 의해서도 준비됐다.38선에 국한하면 적어도 1945년 7월 25일경 포츠담회담에서 획정되었으며 8월 11일 새벽에 이를 ‘실무적’으로 확정한데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저자는 “38선 획정을 둘러싼 ‘졸속결정설’과 ‘군사적편의설’ 등 기존의 정설은 ‘포츠담획정설’과 ‘정치적의도설’로 대치돼야 한다”고주장하고 “이는 한반도 분단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희석시키려는 의도적 책임회피”라고 반박했다.2만5,000원.
정운현기자 jwh59@
이같은 의혹은 마침내 한 소장학자의 집념에 의해 베일을벗게 됐다.
이완범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는 최근 ‘삼팔선 획정의비밀’(지식산업사)를 출간했다.이 책은 그가 지난 94년 국사편찬위원회 재직시 자료수집차 미국 내셔널아카이브(국립문서보관소)에 출장갔다가 소위 38선 획정지도(책 표지)를복사해 그동안 학계에서 정설로 인정해온 ‘러스크 증언’이 위증임을 증명한뒤 7년여의 확인작업 끝에 내놓은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38선을 그은 주인공으로 알려진 러스크는 이 지도를 보고 38선의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했는데 이지도에는 문제의 38선이 명기돼 있지 않았으며,35도선과 40도선만 그어져 있었다.다시말해 러스크가 이 지도를 보고 38도선 아래에 서울이 있었다는 것을 확신하기는 어려운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다른 지도를 활용했거나,아니면 누군가 이미 38선을 그은 것을 의도적으로 은폐하기 위해 뒤집어 쓴 것이라는 얘기가 된다.
38선 획정의 진실을 알아보기 위해 96년 그는 직장에 사표를 던지고 미국으로 향했다.그는 38선 획정지도가 한 장이아니라 3종류임을 확인하게 되었고,97년 6월 미 작전국장헐 중장의 증언기록 발굴을 통해 러스크는 이미 상부로부터 기안된 38선을 그려넣은 하수인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1945년 7월 25일경 포츠담에서미 작전국장 헐 중장과 전략정책단장 린컨 준장은 당시 번스 미 국무장관의 지시 아래 미·소간의 지상 작전분계선인 38선 근처의 이른바 ‘헐선(線)’을 획정한 것으로 나타났다.당초 미국은 한반도를 독점할 생각이었으나 소련의 참전으로 분할점령이 불가피하게 되자 부산·인천·원산 등 3개항 가운데 2개항(부산·인천)과 수도 서울을 포함하는 38도선으로 획정하게 된 것이다.당시 미국은 한반도가 신탁통치 이외에 미·소간 합의된 협정 없이 힘의 공백지대로 남게되자 소련의 독점을 우려한 나머지 1945년 8월 중순 한반도 분할을 서둘러 결정했다.본스틸과 러스크는 헐 중장과 그의 부하인 전략정책단장 린컨 소장에 의해 이미 결정된 38도선을 지도상에 그려넣은 데 불과한 것이다.
한국점령 계획은 일본의 패전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던 1944년부터 미 국무부에 의해 준비되었으며,1945년 2월부터는미 군부에 의해서도 준비됐다.38선에 국한하면 적어도 1945년 7월 25일경 포츠담회담에서 획정되었으며 8월 11일 새벽에 이를 ‘실무적’으로 확정한데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저자는 “38선 획정을 둘러싼 ‘졸속결정설’과 ‘군사적편의설’ 등 기존의 정설은 ‘포츠담획정설’과 ‘정치적의도설’로 대치돼야 한다”고주장하고 “이는 한반도 분단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희석시키려는 의도적 책임회피”라고 반박했다.2만5,000원.
정운현기자 jwh59@
2001-08-15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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