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년전,중학교 시절 국어시간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서울 대연각 호텔 화재사건이 화제에 올랐다. 선생님은 투숙객들이 화재현장을 탈출하는 방식을 두고 한·중·일 3국의 국민성을 재미있게 비유했다. 외교관이었던 중국인은창문 앞에 서서 구조될 때까지 기다리다 가망이 없자 홀연히 연기속으로 사라지고,일본인은 재빨리 침대시트를 찢어만든 줄을 타고 내려왔다는 것이다.우리는 침대 매트에 대충 몸을 의지해 창밖으로 뛰어내렸다고 했다. 중국인의 대국 기질과 일본인의 치밀함에 비해 우리나라 사람은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정신’의 표상이었다는 자조섞인 분석도 곁들였다.
기자가 돼 중국과 일본을 취재할 기회를 여러차례 가졌다.그 가운데 지난해 9월 한일정상회담이 열렸던 아타미(熱海)가 인상깊다.숙소인 호텔 고층에서 내려다 본 아타미시가는 조그마한 어촌인데도 그렇게 정갈할 수가 없었다.
어촌 특유의 비릿한 냄새 대신 신선한 바닷바람이 앞섰고,길다랗게 펼쳐진 해변가에는 우리네와 달리 과자봉지나 음료캔을 찾아볼 수 없었다.건물 옥상의 깨끗함에서는 감탄이 절로 우러 나왔다.‘질서와 청결면에서 우리를 앞서 있구나’ 기자생활을 하면서 동북아 3국을 비교할 때면 중학교 시절 들었던 은사의 평가가 원류(源流)가 되어 떠오른다.또다른 차이를 찾으려 무던히 애썼지만,은사의 분석은 너무깊게 각인되어 있었다.
일본이 패전 56년이 지난 오늘,왜곡 역사교과서를 통해극우경향을 강화하고 13일에는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가 기습적으로 야스쿠니(靖國) 신사 참배를 강행했다.어렵사리 일궈낸 ‘21세기 한·일 공동 파트너십’복원은 요원한 일처럼 보인다. 당초 계획했던 15일을 이틀앞당긴 외교적 절충점을 모색했다 하더라도 여기에는 경제강국으로서 일본의 오만함이 깔려있다. 또 분,초를 다투는급박한 화재현장에서 천을 찢어 줄을 만드는 ‘영악함’의다른 표현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중국 개방 초창기에 직장을 그만두고 퇴직금을 털어 중국으로 진출한 사람들이 많다.치밀한 사전 준비없이 넓은 시장만을 보고 무작정 건너갔고,대개가 갖은 고생만을 하다돌아왔다.그러나 척박한 환경에서 우리 특유의 친화력과부지런함으로 성공한 사람도 더러 있다.
당시 주중 한국대사관에 근무하던 한 외교관이 “10명 가운데 2∼3명은 성공했다”며 “일본인은 엄두도 내지 못할일”이라고 말한 것을 들은 적이 있다.그러면서 무모한 듯보이지만 부딪쳐 보고 이를 극복해내는 끈질김이 없었다면,즉 우리가 중국인이나 일본인과 똑같았다면 벌써 역사에서사라졌을 것이라고 했다. 공공질서와 깨끗함에서는 일본에뒤질지 모르지만, 우리 민족을 지탱하는 특장이 있다는 것이다. 불이 난 고층호텔에서 침대 매트를 붙들고 뛰어내리는 저돌성도 그 중 하나라면 지나친 국수주의적 시각일까.
일제 35년 치하에서 단 하루도 쉬지 않고 독립운동을 한민족을 지구상에서 찾기란 쉽지 않다. 우리 아니면 누구도따라 할 수 없는 끈질기고,고난도 마다하지 않은 대장정이었다.‘우리 스스로에 대한 칭찬’-8·15 광복 56주년를맞는 단상이다.
▲양승현 정치팀장
서울 대연각 호텔 화재사건이 화제에 올랐다. 선생님은 투숙객들이 화재현장을 탈출하는 방식을 두고 한·중·일 3국의 국민성을 재미있게 비유했다. 외교관이었던 중국인은창문 앞에 서서 구조될 때까지 기다리다 가망이 없자 홀연히 연기속으로 사라지고,일본인은 재빨리 침대시트를 찢어만든 줄을 타고 내려왔다는 것이다.우리는 침대 매트에 대충 몸을 의지해 창밖으로 뛰어내렸다고 했다. 중국인의 대국 기질과 일본인의 치밀함에 비해 우리나라 사람은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정신’의 표상이었다는 자조섞인 분석도 곁들였다.
기자가 돼 중국과 일본을 취재할 기회를 여러차례 가졌다.그 가운데 지난해 9월 한일정상회담이 열렸던 아타미(熱海)가 인상깊다.숙소인 호텔 고층에서 내려다 본 아타미시가는 조그마한 어촌인데도 그렇게 정갈할 수가 없었다.
어촌 특유의 비릿한 냄새 대신 신선한 바닷바람이 앞섰고,길다랗게 펼쳐진 해변가에는 우리네와 달리 과자봉지나 음료캔을 찾아볼 수 없었다.건물 옥상의 깨끗함에서는 감탄이 절로 우러 나왔다.‘질서와 청결면에서 우리를 앞서 있구나’ 기자생활을 하면서 동북아 3국을 비교할 때면 중학교 시절 들었던 은사의 평가가 원류(源流)가 되어 떠오른다.또다른 차이를 찾으려 무던히 애썼지만,은사의 분석은 너무깊게 각인되어 있었다.
일본이 패전 56년이 지난 오늘,왜곡 역사교과서를 통해극우경향을 강화하고 13일에는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가 기습적으로 야스쿠니(靖國) 신사 참배를 강행했다.어렵사리 일궈낸 ‘21세기 한·일 공동 파트너십’복원은 요원한 일처럼 보인다. 당초 계획했던 15일을 이틀앞당긴 외교적 절충점을 모색했다 하더라도 여기에는 경제강국으로서 일본의 오만함이 깔려있다. 또 분,초를 다투는급박한 화재현장에서 천을 찢어 줄을 만드는 ‘영악함’의다른 표현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중국 개방 초창기에 직장을 그만두고 퇴직금을 털어 중국으로 진출한 사람들이 많다.치밀한 사전 준비없이 넓은 시장만을 보고 무작정 건너갔고,대개가 갖은 고생만을 하다돌아왔다.그러나 척박한 환경에서 우리 특유의 친화력과부지런함으로 성공한 사람도 더러 있다.
당시 주중 한국대사관에 근무하던 한 외교관이 “10명 가운데 2∼3명은 성공했다”며 “일본인은 엄두도 내지 못할일”이라고 말한 것을 들은 적이 있다.그러면서 무모한 듯보이지만 부딪쳐 보고 이를 극복해내는 끈질김이 없었다면,즉 우리가 중국인이나 일본인과 똑같았다면 벌써 역사에서사라졌을 것이라고 했다. 공공질서와 깨끗함에서는 일본에뒤질지 모르지만, 우리 민족을 지탱하는 특장이 있다는 것이다. 불이 난 고층호텔에서 침대 매트를 붙들고 뛰어내리는 저돌성도 그 중 하나라면 지나친 국수주의적 시각일까.
일제 35년 치하에서 단 하루도 쉬지 않고 독립운동을 한민족을 지구상에서 찾기란 쉽지 않다. 우리 아니면 누구도따라 할 수 없는 끈질기고,고난도 마다하지 않은 대장정이었다.‘우리 스스로에 대한 칭찬’-8·15 광복 56주년를맞는 단상이다.
▲양승현 정치팀장
2001-08-15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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