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들로서는 아쉬운 일이겠지만,더 감격할 수도 있었고 더 회자될 수도있었던 남북정상회담의 특수(特需)가 병원 폐업으로 사그라진 것은 안타까운일이다. 온 국민이 되뇌었듯이 분단 이후 최초로 이뤄진 남북정상회담은 국민 모두가 감격하기에 충분한 사건이었고 어쩌면 통일을 위한 진일보로서 의미가 그만큼 큰 역사적 사건이었다.그러나 이제 잠시 냉정을 되찾아 일상으로 돌아와 생각해 보면,남북문제를 공부하는 사람의 눈에는 그간의 일련의추이가 참으로 아슬아슬하게만 느껴졌고 때로는 불안감마저 느끼는 경우도있었다.
우리가 불안을 느낀 첫번째 이유는 협상의 진행과 방법이 정도가 아니었기때문이었다.여기에서 정도가 아니라 함은 밀사들의 경망스러움을 지적하는것이다.현대외교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듣고 있는 니콜슨 경의 지적에 따르면,외교는 공개되어야 하지만 협상은 비밀에 부쳐져야 한다.그런데 그 중요한정상회담이 평양에서 진행되기도 전부터 공명심에 젖은 밀사들은 경망하게협상의 이면사를 흘리기 시작했다.이것은 통치권자에 대한도리가 아니다.
밀사의 행적은 영원히 가슴에 묻고 갈 일이 많다.밀사는 입이 무거워야 한다.정말로 역사의 진실을 위해 말하고 싶다면 먼 훗날,이 작업이 잘 끝난 뒤에 회고록을 쓸 일이지 연예가의 추문과 함께 월간지의 목차를 장식할 일이아니었다.그런 점에서 이번의 밀사들은 참으로 경솔했다.흔히 말하는 국민의알 권리는 국익에 우선할 수가 없다.
남북대화에서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되는 7·4공동성명(1972년)은 비밀협상이 낳은 산물이었다.그러나 이러한 업적은 1년 후에 발표된 6·23선언(1973년)으로 무산되었다.6·23선언은 국제연합의 동시 가입과 할슈타인원칙의 포기라는 점에서 종래의 우익적 시각을 벗어난 매우 획기적인 결단이었다.그러나 그것이 정통성의 위기에 몰린 위정자의 공명심이 빚은 일방적 선언이었고입이 무거웠어야 할 대목에서 할 말과 안할 말을 구분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당시 이미 남북조절위원회가 운영되고 있던 상황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선언식 제의를 자제하고 비밀협상을 통하여 합의를 도출하고 의견을 개진했어야 옳았다.
두 번째로 우리가 불안하게 생각하는 대목은 남한측에서는 통일문제의 전문가를 양성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이미 미국에서는 협상학이 하나의 학문으로 자리잡고 있고 이를 통하여 전문가가 배출되고 있는 상황이지만 우리에게는 이러한 제도가 없기 때문에 국제교섭에서 실수를 저지르는 일이 비일비재했다.논리의 옳고 그름의 문제를 떠나서 생각한다면,남북대화에서 북한은일관된 입장을 견지한 반면에 남한은 그렇지 못했는데 이는 전문가가 빈번히교체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민주사회의 특성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남한이 북한에 끌려다니게 만들었다.통일문제는 현장에서 오랜 경험을쌓은 실무자들의 일관된 작업이어야 한다.통일은 정치협상이지 학술세미나가아니다.
셋째로 우리는 이 천재일우의 기회가 정권의 내수용(內需用)으로 쓰여지지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역대 정권의 남북문제는 국내정치의 수세를 만회하기 위한 반역사적 정치 조작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그런 점에서 이제까지의통일논의는 가슴으로 말하지 않았다.예컨대,1997년의 황장엽 망명사건은 남북문제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시사를 준다.당시 정부는 사태의 심각함과 중국정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한보비리로 인한 정권의 위기를 희석시키기 위해 사건 7시간만에 이를 공표하는 반국가적 행위를 자행했다.역사가 이점을 추궁할 날이 올 것이다.
◆ 申 福 龍 건국대교수·정치학
우리가 불안을 느낀 첫번째 이유는 협상의 진행과 방법이 정도가 아니었기때문이었다.여기에서 정도가 아니라 함은 밀사들의 경망스러움을 지적하는것이다.현대외교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듣고 있는 니콜슨 경의 지적에 따르면,외교는 공개되어야 하지만 협상은 비밀에 부쳐져야 한다.그런데 그 중요한정상회담이 평양에서 진행되기도 전부터 공명심에 젖은 밀사들은 경망하게협상의 이면사를 흘리기 시작했다.이것은 통치권자에 대한도리가 아니다.
밀사의 행적은 영원히 가슴에 묻고 갈 일이 많다.밀사는 입이 무거워야 한다.정말로 역사의 진실을 위해 말하고 싶다면 먼 훗날,이 작업이 잘 끝난 뒤에 회고록을 쓸 일이지 연예가의 추문과 함께 월간지의 목차를 장식할 일이아니었다.그런 점에서 이번의 밀사들은 참으로 경솔했다.흔히 말하는 국민의알 권리는 국익에 우선할 수가 없다.
남북대화에서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되는 7·4공동성명(1972년)은 비밀협상이 낳은 산물이었다.그러나 이러한 업적은 1년 후에 발표된 6·23선언(1973년)으로 무산되었다.6·23선언은 국제연합의 동시 가입과 할슈타인원칙의 포기라는 점에서 종래의 우익적 시각을 벗어난 매우 획기적인 결단이었다.그러나 그것이 정통성의 위기에 몰린 위정자의 공명심이 빚은 일방적 선언이었고입이 무거웠어야 할 대목에서 할 말과 안할 말을 구분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당시 이미 남북조절위원회가 운영되고 있던 상황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선언식 제의를 자제하고 비밀협상을 통하여 합의를 도출하고 의견을 개진했어야 옳았다.
두 번째로 우리가 불안하게 생각하는 대목은 남한측에서는 통일문제의 전문가를 양성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이미 미국에서는 협상학이 하나의 학문으로 자리잡고 있고 이를 통하여 전문가가 배출되고 있는 상황이지만 우리에게는 이러한 제도가 없기 때문에 국제교섭에서 실수를 저지르는 일이 비일비재했다.논리의 옳고 그름의 문제를 떠나서 생각한다면,남북대화에서 북한은일관된 입장을 견지한 반면에 남한은 그렇지 못했는데 이는 전문가가 빈번히교체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민주사회의 특성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남한이 북한에 끌려다니게 만들었다.통일문제는 현장에서 오랜 경험을쌓은 실무자들의 일관된 작업이어야 한다.통일은 정치협상이지 학술세미나가아니다.
셋째로 우리는 이 천재일우의 기회가 정권의 내수용(內需用)으로 쓰여지지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역대 정권의 남북문제는 국내정치의 수세를 만회하기 위한 반역사적 정치 조작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그런 점에서 이제까지의통일논의는 가슴으로 말하지 않았다.예컨대,1997년의 황장엽 망명사건은 남북문제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시사를 준다.당시 정부는 사태의 심각함과 중국정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한보비리로 인한 정권의 위기를 희석시키기 위해 사건 7시간만에 이를 공표하는 반국가적 행위를 자행했다.역사가 이점을 추궁할 날이 올 것이다.
◆ 申 福 龍 건국대교수·정치학
2000-07-03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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