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간에 성공적인 삶이 있듯 소설 동네에는 성공적인 ‘소설적 삶’이 있다.
소설 밖 인생과는 달리 소설 속 인생의 성패는 작가의 솜씨 하나에 좌우된다.
소설에 나오는 삶,소설 속 인생은 독자들의 평균적인 삶과 비교할 때 유별나게 우여곡절과 사연이 많다.그래서 소설에 이끌릴 터이나,사연과 우여곡절이 겹치다 보면 작중 인생의 리얼리티와 진실성이 손상받을 수 있다.
최근에 출간된 정도상의 장편소설 ‘푸른 방’(한울)과 정준의 실화소설 ‘땅끝맨’(뿌리와날개)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사연많은 인생들이다.나름대로 재미가 있어 독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소설들이다.그러나 두 작품의 ‘소설적 삶’에는 흠이 많이 잡힌다. ‘푸른 방’의 남녀 주인공은 작가가 말하듯이 한국인으로 20세기를 살아오면서 생길 수 있는 역사적 상처를 거의 빠짐없이 지니고 있다.남자의 아버지는 일제 징용에 희생되었고 원폭 피해로 어머니,큰형,할아버지 그리고 네살짜리 아들을 잃었다.
자신은 월남전 참전의 심리적 외상과 함께 고엽제후유증을 앓고 있으며 독일 광부로 취업하면서 순수하게 통일운동에 몸담다가 간첩으로 찍혀 남쪽 고향에는 발도 디딜 수 없게 됐다.여자는 월북 아버지 때문에 시늉으로라도 정상적인 성장과정을 가질 기회를 박탈당했으며 간호사로 독일로 와 남자 주인공과 결혼했으나 북의 아버지 문제에 휘말릴 수 밖에 없게 된다.
이처럼 ‘푸른 방’의 주인공들은 역사적으로 박복하고 같은 또래의 한국인에 비해서도 매우 재수가 없는 케이스다.문제는 이 상처많은 삶의 보편성 여부가 아니라 이 상처와 삶들이 소설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나 있는가 하는 점이다.주인공들의 역사적 상처는 장시간의 연대기로서 깊이 침전된 탓에 현재 상태로 분기(奮起)될 계기가 주어져야 하는데 작가가 동원한 현재화의 장치(여자 동성애)는 엉뚱해 보인다.독자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풍속이라서가 아니라 누적된 상처와는 본질적으로 연이 없기 때문이다.
‘푸른 방’을 가득 채우고 있는 상처의 리스트들은 현재의 살을 재생시키지 못해 끝내 과거의 뼈로 남아있는 인상이다.이에 반해 정준의 ‘땅끝맨’이 이야기하는 과거의 삶은 상당부분 팔팔 살아서 움직인다.이 작품은 지난50년대 중반 부산의 최빈곤층에서 태어난 한 남자가 살아온 이야기다.
주인공은 흔한 말로 운수가 기박해 불행과 좌절로 점철되는 길을 걸어왔다.
운없고 아무리 애써도 가난한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느냐만서도 주인공의 박복하고 불우한 팔자가 너무도 거세고 완강해 인간사의 부조리를 적시하려는 우화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물론 이 작품은 실화소설이란 표제가 말하듯 실제의 삶을 그대로 기록한 측면이 강하다.‘땅끝맨’의 고난은 일견 ‘푸른 방’의 상처보다 절실하게 다가온다.이 점이 이 작품의 매력이지만 한계이기도 하다.즉 ‘땅끝맨’의 매력은 픽션보다는 넌픽션 성격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야기가 뒤로 갈수록 소설화의 빈약함이 두드러져 독자들의 관심이 약해진다.
고생 끝에 극적으로 ‘안토니오 꼬레아’란 역사소설을 완성시킨 정준이란특정 개인의 고난사가 불굴의 의지를 배경으로 자못 감동적이지만 이 기구한 삶은어떤 소설적 전형으로 크지 못하고 개인적 차원에 머무르고 만다.소설화의 여지가 처음부터 좁은 실화소설이기 때문이다.
외적 사연이 많은 주인공 소설은 90년대부터 사적 감수성이나 심리 소설의물살에 밀려 멀리 떠내려 갔다.‘푸른 방’이나 ‘땅끝맨’이 어떤 새 기류의 전조라고 말하기는 이르다.다만 사연 소설을 새롭게 쓰고 싶은 작가들은성공적인 ‘소설적 삶’의 두께와 폭을 더 정밀하게 궁구해야 할 것이다.
김재영기자 kjykjy@
소설 밖 인생과는 달리 소설 속 인생의 성패는 작가의 솜씨 하나에 좌우된다.
소설에 나오는 삶,소설 속 인생은 독자들의 평균적인 삶과 비교할 때 유별나게 우여곡절과 사연이 많다.그래서 소설에 이끌릴 터이나,사연과 우여곡절이 겹치다 보면 작중 인생의 리얼리티와 진실성이 손상받을 수 있다.
최근에 출간된 정도상의 장편소설 ‘푸른 방’(한울)과 정준의 실화소설 ‘땅끝맨’(뿌리와날개)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사연많은 인생들이다.나름대로 재미가 있어 독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소설들이다.그러나 두 작품의 ‘소설적 삶’에는 흠이 많이 잡힌다. ‘푸른 방’의 남녀 주인공은 작가가 말하듯이 한국인으로 20세기를 살아오면서 생길 수 있는 역사적 상처를 거의 빠짐없이 지니고 있다.남자의 아버지는 일제 징용에 희생되었고 원폭 피해로 어머니,큰형,할아버지 그리고 네살짜리 아들을 잃었다.
자신은 월남전 참전의 심리적 외상과 함께 고엽제후유증을 앓고 있으며 독일 광부로 취업하면서 순수하게 통일운동에 몸담다가 간첩으로 찍혀 남쪽 고향에는 발도 디딜 수 없게 됐다.여자는 월북 아버지 때문에 시늉으로라도 정상적인 성장과정을 가질 기회를 박탈당했으며 간호사로 독일로 와 남자 주인공과 결혼했으나 북의 아버지 문제에 휘말릴 수 밖에 없게 된다.
이처럼 ‘푸른 방’의 주인공들은 역사적으로 박복하고 같은 또래의 한국인에 비해서도 매우 재수가 없는 케이스다.문제는 이 상처많은 삶의 보편성 여부가 아니라 이 상처와 삶들이 소설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나 있는가 하는 점이다.주인공들의 역사적 상처는 장시간의 연대기로서 깊이 침전된 탓에 현재 상태로 분기(奮起)될 계기가 주어져야 하는데 작가가 동원한 현재화의 장치(여자 동성애)는 엉뚱해 보인다.독자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풍속이라서가 아니라 누적된 상처와는 본질적으로 연이 없기 때문이다.
‘푸른 방’을 가득 채우고 있는 상처의 리스트들은 현재의 살을 재생시키지 못해 끝내 과거의 뼈로 남아있는 인상이다.이에 반해 정준의 ‘땅끝맨’이 이야기하는 과거의 삶은 상당부분 팔팔 살아서 움직인다.이 작품은 지난50년대 중반 부산의 최빈곤층에서 태어난 한 남자가 살아온 이야기다.
주인공은 흔한 말로 운수가 기박해 불행과 좌절로 점철되는 길을 걸어왔다.
운없고 아무리 애써도 가난한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느냐만서도 주인공의 박복하고 불우한 팔자가 너무도 거세고 완강해 인간사의 부조리를 적시하려는 우화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물론 이 작품은 실화소설이란 표제가 말하듯 실제의 삶을 그대로 기록한 측면이 강하다.‘땅끝맨’의 고난은 일견 ‘푸른 방’의 상처보다 절실하게 다가온다.이 점이 이 작품의 매력이지만 한계이기도 하다.즉 ‘땅끝맨’의 매력은 픽션보다는 넌픽션 성격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야기가 뒤로 갈수록 소설화의 빈약함이 두드러져 독자들의 관심이 약해진다.
고생 끝에 극적으로 ‘안토니오 꼬레아’란 역사소설을 완성시킨 정준이란특정 개인의 고난사가 불굴의 의지를 배경으로 자못 감동적이지만 이 기구한 삶은어떤 소설적 전형으로 크지 못하고 개인적 차원에 머무르고 만다.소설화의 여지가 처음부터 좁은 실화소설이기 때문이다.
외적 사연이 많은 주인공 소설은 90년대부터 사적 감수성이나 심리 소설의물살에 밀려 멀리 떠내려 갔다.‘푸른 방’이나 ‘땅끝맨’이 어떤 새 기류의 전조라고 말하기는 이르다.다만 사연 소설을 새롭게 쓰고 싶은 작가들은성공적인 ‘소설적 삶’의 두께와 폭을 더 정밀하게 궁구해야 할 것이다.
김재영기자 kjykjy@
2000-01-19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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