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키운 것은 8할이 바람이었다”고 어느 시인은 고백했지만,나를 키운 것은 온통 어머니였다.아득한 옛날 고려의 어느 가객(歌客)이 ‘사모곡’(思母曲)에서 비유로 읊었듯이 호미(아버지)도 날이건만 낫(어머니)같이 들리는 없는 것일까.MBC TV의 주간 연속극 ‘육남매’를 보다가 나도 모르게시야가 흐릿해지는 적이 있다.
연속극 속의 어머니는 올망졸망한 육남매를 모두 혼자 거두면서 떡장사,묵장사,남의 집 빨래 해주기 등으로 생계를 이어간다.역시 육남매를 두었던 우리 어머니는 막내인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까지는 남편과 함께 아이들을 키울 수 있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하지만 그 여인에게도 상부(喪夫)와 함께 지독한 인고(忍苦)의 세월이 찾아든다.
막내가 중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하자 일단 학비는 면제받게 되었다며 기뻐하시던 어머니는 이내 자식 뒷바라지를 위해 시골집을 버리고 시내로 나왔다.
출가한 셋째딸네 집에 잠시 맡겨두었던 솜털 송송한 신입생 막내아들을 당신 품으로 다시 불러들인 어머니는 목포역 앞 도로변에 판잣집을 짓고 짐꾼들을 상대로 밥장사를 시작했다.우리의 첫번째 ‘판잣집시대’ 3년은 도무지잠을 모르던 억척스러운 어머니가 사시장철 입었던 몸뻬로 지금도 내 기억의 액자에 담겨 있다.
중학교를 마친 아들을 서울로 유학 보낸 어머니는 목포 둘째딸네 집으로 거처를 옮겨 가끔 사위의 눈치도 보면서 서울의 아들을 편지로 원격훈육(遠隔訓育)하였다.딸이 꼭두새벽에 집을 나서는지라 식구들 아침밥 준비는 어머니 차지였는데,어머니는 뒤주에서 바가지로 퍼낸 쌀에서 매일 한줌씩을 덜어따로 항아리에 모았다가 그것을 팔아 고학하는 막내에게 학비에 보태라며 부쳐주곤 하였다.그러면서 어머니는 짬짬이 고향에서 도붓장사를 했고 고등학생 아들은 서울에서 겨울밤 군밤장사를 했다.
대학 4학년때 어머니와 나는 서울에서 두번째 ‘판잣집시대’를 열었다.7년 만에 모자가 함께 살게 된 것이다.가정교사로 모은 약간의 돈으로 청량리홍릉 산기슭에 판잣집을 짓고 이번에는 아들이 어머니를 모셨다.이 집에서는 어머니와 바로 위의 형,그리고 나,세 사람이 살았다.
같은해 가을 나는 친구와 함께 고시공부를 위해 고향의 어느 절에 들어갔다.역으로 가려고 청량리 집을 나서려는데 어머니가 몸뻬를 뒤적거리시더니 꼬깃꼬깃한 지폐 두 장을 꺼내 내 손에 쥐어 주셨다.
사흘 뒤 절에서 소복 입은 어머니 꿈을 꾸었다.날이 밝아 다시 책을 붙들고씨름하고 있는데 어머니의 부음이 날아들었다.바로 추석날이었다.
<신윤철 공정거래위원장>
연속극 속의 어머니는 올망졸망한 육남매를 모두 혼자 거두면서 떡장사,묵장사,남의 집 빨래 해주기 등으로 생계를 이어간다.역시 육남매를 두었던 우리 어머니는 막내인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까지는 남편과 함께 아이들을 키울 수 있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하지만 그 여인에게도 상부(喪夫)와 함께 지독한 인고(忍苦)의 세월이 찾아든다.
막내가 중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하자 일단 학비는 면제받게 되었다며 기뻐하시던 어머니는 이내 자식 뒷바라지를 위해 시골집을 버리고 시내로 나왔다.
출가한 셋째딸네 집에 잠시 맡겨두었던 솜털 송송한 신입생 막내아들을 당신 품으로 다시 불러들인 어머니는 목포역 앞 도로변에 판잣집을 짓고 짐꾼들을 상대로 밥장사를 시작했다.우리의 첫번째 ‘판잣집시대’ 3년은 도무지잠을 모르던 억척스러운 어머니가 사시장철 입었던 몸뻬로 지금도 내 기억의 액자에 담겨 있다.
중학교를 마친 아들을 서울로 유학 보낸 어머니는 목포 둘째딸네 집으로 거처를 옮겨 가끔 사위의 눈치도 보면서 서울의 아들을 편지로 원격훈육(遠隔訓育)하였다.딸이 꼭두새벽에 집을 나서는지라 식구들 아침밥 준비는 어머니 차지였는데,어머니는 뒤주에서 바가지로 퍼낸 쌀에서 매일 한줌씩을 덜어따로 항아리에 모았다가 그것을 팔아 고학하는 막내에게 학비에 보태라며 부쳐주곤 하였다.그러면서 어머니는 짬짬이 고향에서 도붓장사를 했고 고등학생 아들은 서울에서 겨울밤 군밤장사를 했다.
대학 4학년때 어머니와 나는 서울에서 두번째 ‘판잣집시대’를 열었다.7년 만에 모자가 함께 살게 된 것이다.가정교사로 모은 약간의 돈으로 청량리홍릉 산기슭에 판잣집을 짓고 이번에는 아들이 어머니를 모셨다.이 집에서는 어머니와 바로 위의 형,그리고 나,세 사람이 살았다.
같은해 가을 나는 친구와 함께 고시공부를 위해 고향의 어느 절에 들어갔다.역으로 가려고 청량리 집을 나서려는데 어머니가 몸뻬를 뒤적거리시더니 꼬깃꼬깃한 지폐 두 장을 꺼내 내 손에 쥐어 주셨다.
사흘 뒤 절에서 소복 입은 어머니 꿈을 꾸었다.날이 밝아 다시 책을 붙들고씨름하고 있는데 어머니의 부음이 날아들었다.바로 추석날이었다.
<신윤철 공정거래위원장>
1999-07-27 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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