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립화 통일론’이 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키자 장면(張勉)정부는서둘러 불끄기에 나선다.1960년 11월2일 장면총리는 담화를 발표해 오스트리아식의 중립화 방안을 받아들일 수 없음을 분명히 밝힌다.
장총리는 그 이유로 한국과 오스트리아의 지정학적 차이점을 제시했다.‘소련·중공과 인접한 한국이 전략적인 가치가 훨씬 높다’는 점을 비롯 ▲침략을 당하면 오스트리아는 즉각 지원 받을 수 있지만 한국은 지원군이 바다 건너 있다 ▲중립국이 되기 전 오스트리아는 단일정부를 유지했지만 한국은 남북으로 갈려 전쟁까지 치렀다는 사실 들을 지적했다.따라서 “유엔 감시하남북총선거가 현정부의 유일한 통일방안”이라고 장총리는 거듭 강조했다.
같은 날 민의원도 ‘대한민국 헌법 절차에 따라 유엔 감시하에 인구비례로자유선거를 실시하는’통일방안을 만장일치로 결의해 이를 제15차 유엔총회에 전달키로 했다.‘대한민국 헌법 절차를 따른다’는 전제조건을 단 민의원 결의는 장면정부의 통일정책보다 더욱 보수적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장면정부를 긴장케 한 요인은 혁신계도,중립화 통일론도 아니었다.4월혁명의 주역인 학생세력이 통일논쟁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이었다.
학생들은 4월혁명으로 이승만(李承晩)정권이 무너지자 이에 만족하고 ‘혁명과업 수행’은 기성 정치인들에게 맡기는 듯했다.이들은 학교로 돌아가 학도호국단 대신 학생회를 구성하고 어용교수 퇴진과 재단 민주화를 요구하는 등 학원민주화운동에 나섰다.또 공명선거·농촌계몽·국산품애용 같은 국민계몽운동을 적극적으로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통일논쟁이 확산되자 학원가는 그 흡인력에 급속히 빨려들어갔다.각대학에는 통일문제를 연구하는 동아리가 들어섰고 크고작은 토론회·강연회가 잇따랐다.
11월18일 서울대에서 300여 학생이 참여해 ‘서울대 민족통일연맹(民統)’을 결성했다.이들은 ▲통일에 관한 국민의식을 높이고 ▲분위기를 무르익게 하며 ▲통일방안을 정부·사회에 제시해 여론을 조성하겠다고 공표했다.아울러 ‘북한 학도’들에게는 “4·19로 이승만정권을 타도했듯이 김일성(金日成)정권을 타도하자”는 메시지를 보냈다.이들의 통일론은 한마디로 ‘기성 정치인은 믿지 못하니 남북의 학생들이 직접 나서자’는 것이었다.
61년 들어 정부의 ‘유엔 주도하 통일’방안에 충격을 주는 사태가 발생했다.4월12일 제15차 유엔총회 정치위원회에서 한국문제 토의에 남북한을 동시에 초청하자는 안이 나왔다.당시 중립국이던 인도네시아가 제출한 ‘동시초청안’이 높은 지지를 받자 미국대사 스티븐슨은 ‘북한이 유엔의 권위와 권능을 수락할 경우에만 초청한다’는 수정안을 냈다.‘스티븐슨 안’은 59대 14로 통과된다.
그동안 유엔이 통한(統韓)문제를 토의하면서 늘 남한 대표만을 초청해 왔기때문에 조건부라 해도 북한이 함께 초청받은 사실은 국내에 큰 영향을 미쳤다.‘스티븐슨 안’자체를 반대하던 장면정부는 막상 수정안이 통과되자 다음날 환영 성명을 발표한다.
장면총리는 “공산측이 기왕의 파괴적 태도를 청산하고 이 획기적인 결의의모든 조건을 성실히 충족시킬 것을 강력히 요구한다”면서 북한이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UNCURK)을 받아들여 그 임무수행을가능케 하라고 촉구했다.
이같은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 표명과는 달리 사회 분위기는 “스티븐슨 안은 미국이 북한과 타협하는 것”이라는 우려가 높았고 보수계 신문들은 “정치인들이 충격을 받아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할 정도”라고 보도했다.
남한 사회는 이제 통일논쟁으로 용광로처럼 달아올랐다.혁신계와 급진 학생세력이 ‘어떻게든 통일만은 이루어야 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공격적으로나온 반면 장면정부는 기존 원칙만을 고수하며 소극적·방어적으로 대응할수밖에 없었다.북한은 북한대로 혁신계·학생세력을 부추기는 제안을 끊임없이 해댔다.유엔을 중심으로 한 국제사회도 한국 통일을 바라보는 시각이 점차 변해갔다.
그 달구어진 용광로의 문을 열어제끼려고 한 세력은 학생들이었다.‘중립화’니 ‘남북교류’니 논쟁 차원에 머물던 통일문제에 행동으로 나선 것이다.
4·19 1주년 기념일을 맞아 민통은 시국선언문을 발표,“통일을 기피하고 민족통일세력을 탄압하는 현정권은 피를 보기 전에 물러나라”고 직격탄을 날렸다.이어 5월3일 남북문화교류의 전제로서 남북학생 모임을 갖자고 북한 학생들에게 제의했다.
이틀뒤 전국 18개 대학과 경북고 대표가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민통학련)’결성준비대회를 열고 판문점에서 남북학생회담을 열겠다고 발표했다.혁신계 정당과 사회단체들은 즉각 이를 환영했으나 집권 민주당과 신민당(민주당 구파)등 기성 정치권은 우려를 표명했다.
정부 대변인인 정헌주(鄭憲柱)국무원 사무처장은 ”학생들의 주장은 정부 방침에 어긋나기 때문에 허용할 수 없다”면서 “순진한 학생들이 공산당의 흉계에 넘어가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보호할 의무가 정부에게 있다”고 단호한입장을 밝혔다.
5월13일 민통학련은 ‘남북학생회담 및 통일축제’개최 원칙을 공개했고 정부는 이에 대해 “학생들이 판문점에 가면 전원 체포하겠다”고 발표했다.그러나 3일후부터 통일논의는 쿠데타군의 총검에 눌려 전면중단된다.
‘가자 북으로,오라 남으로’를 외치던 학생이건,‘중립화’를 꼭 이뤄야 하느냐 아니냐로 다투던 혁신계건 그 운명은 장면정부와 다르지 않았다.박정희(朴正熙)시대에 ‘통일지상주의자’들은 자유당정권 때보다도 훨씬 가혹한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분단의 역사에서 통일은 우리 민족이 풀어야 할 가장 중요한 숙제임에 틀림없다.민주주의가 활짝 꽃핀 제2공화국에서 통일논의가 최고의 이슈로 떠오른 것도 자연스런 일이었다.
하지만 체제간 경쟁이 엄존한 현실을 무시하고 이상에만 치우친 통일론,자파(自派)의 세력 확장에 급급해 중구난방 식으로 쏟아부은 통일론은 급기야 스스로가 발디딘 토대마저 무너뜨리고야 말았다.
이용원기자 ywyi@
장총리는 그 이유로 한국과 오스트리아의 지정학적 차이점을 제시했다.‘소련·중공과 인접한 한국이 전략적인 가치가 훨씬 높다’는 점을 비롯 ▲침략을 당하면 오스트리아는 즉각 지원 받을 수 있지만 한국은 지원군이 바다 건너 있다 ▲중립국이 되기 전 오스트리아는 단일정부를 유지했지만 한국은 남북으로 갈려 전쟁까지 치렀다는 사실 들을 지적했다.따라서 “유엔 감시하남북총선거가 현정부의 유일한 통일방안”이라고 장총리는 거듭 강조했다.
같은 날 민의원도 ‘대한민국 헌법 절차에 따라 유엔 감시하에 인구비례로자유선거를 실시하는’통일방안을 만장일치로 결의해 이를 제15차 유엔총회에 전달키로 했다.‘대한민국 헌법 절차를 따른다’는 전제조건을 단 민의원 결의는 장면정부의 통일정책보다 더욱 보수적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장면정부를 긴장케 한 요인은 혁신계도,중립화 통일론도 아니었다.4월혁명의 주역인 학생세력이 통일논쟁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이었다.
학생들은 4월혁명으로 이승만(李承晩)정권이 무너지자 이에 만족하고 ‘혁명과업 수행’은 기성 정치인들에게 맡기는 듯했다.이들은 학교로 돌아가 학도호국단 대신 학생회를 구성하고 어용교수 퇴진과 재단 민주화를 요구하는 등 학원민주화운동에 나섰다.또 공명선거·농촌계몽·국산품애용 같은 국민계몽운동을 적극적으로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통일논쟁이 확산되자 학원가는 그 흡인력에 급속히 빨려들어갔다.각대학에는 통일문제를 연구하는 동아리가 들어섰고 크고작은 토론회·강연회가 잇따랐다.
11월18일 서울대에서 300여 학생이 참여해 ‘서울대 민족통일연맹(民統)’을 결성했다.이들은 ▲통일에 관한 국민의식을 높이고 ▲분위기를 무르익게 하며 ▲통일방안을 정부·사회에 제시해 여론을 조성하겠다고 공표했다.아울러 ‘북한 학도’들에게는 “4·19로 이승만정권을 타도했듯이 김일성(金日成)정권을 타도하자”는 메시지를 보냈다.이들의 통일론은 한마디로 ‘기성 정치인은 믿지 못하니 남북의 학생들이 직접 나서자’는 것이었다.
61년 들어 정부의 ‘유엔 주도하 통일’방안에 충격을 주는 사태가 발생했다.4월12일 제15차 유엔총회 정치위원회에서 한국문제 토의에 남북한을 동시에 초청하자는 안이 나왔다.당시 중립국이던 인도네시아가 제출한 ‘동시초청안’이 높은 지지를 받자 미국대사 스티븐슨은 ‘북한이 유엔의 권위와 권능을 수락할 경우에만 초청한다’는 수정안을 냈다.‘스티븐슨 안’은 59대 14로 통과된다.
그동안 유엔이 통한(統韓)문제를 토의하면서 늘 남한 대표만을 초청해 왔기때문에 조건부라 해도 북한이 함께 초청받은 사실은 국내에 큰 영향을 미쳤다.‘스티븐슨 안’자체를 반대하던 장면정부는 막상 수정안이 통과되자 다음날 환영 성명을 발표한다.
장면총리는 “공산측이 기왕의 파괴적 태도를 청산하고 이 획기적인 결의의모든 조건을 성실히 충족시킬 것을 강력히 요구한다”면서 북한이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UNCURK)을 받아들여 그 임무수행을가능케 하라고 촉구했다.
이같은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 표명과는 달리 사회 분위기는 “스티븐슨 안은 미국이 북한과 타협하는 것”이라는 우려가 높았고 보수계 신문들은 “정치인들이 충격을 받아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할 정도”라고 보도했다.
남한 사회는 이제 통일논쟁으로 용광로처럼 달아올랐다.혁신계와 급진 학생세력이 ‘어떻게든 통일만은 이루어야 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공격적으로나온 반면 장면정부는 기존 원칙만을 고수하며 소극적·방어적으로 대응할수밖에 없었다.북한은 북한대로 혁신계·학생세력을 부추기는 제안을 끊임없이 해댔다.유엔을 중심으로 한 국제사회도 한국 통일을 바라보는 시각이 점차 변해갔다.
그 달구어진 용광로의 문을 열어제끼려고 한 세력은 학생들이었다.‘중립화’니 ‘남북교류’니 논쟁 차원에 머물던 통일문제에 행동으로 나선 것이다.
4·19 1주년 기념일을 맞아 민통은 시국선언문을 발표,“통일을 기피하고 민족통일세력을 탄압하는 현정권은 피를 보기 전에 물러나라”고 직격탄을 날렸다.이어 5월3일 남북문화교류의 전제로서 남북학생 모임을 갖자고 북한 학생들에게 제의했다.
이틀뒤 전국 18개 대학과 경북고 대표가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민통학련)’결성준비대회를 열고 판문점에서 남북학생회담을 열겠다고 발표했다.혁신계 정당과 사회단체들은 즉각 이를 환영했으나 집권 민주당과 신민당(민주당 구파)등 기성 정치권은 우려를 표명했다.
정부 대변인인 정헌주(鄭憲柱)국무원 사무처장은 ”학생들의 주장은 정부 방침에 어긋나기 때문에 허용할 수 없다”면서 “순진한 학생들이 공산당의 흉계에 넘어가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보호할 의무가 정부에게 있다”고 단호한입장을 밝혔다.
5월13일 민통학련은 ‘남북학생회담 및 통일축제’개최 원칙을 공개했고 정부는 이에 대해 “학생들이 판문점에 가면 전원 체포하겠다”고 발표했다.그러나 3일후부터 통일논의는 쿠데타군의 총검에 눌려 전면중단된다.
‘가자 북으로,오라 남으로’를 외치던 학생이건,‘중립화’를 꼭 이뤄야 하느냐 아니냐로 다투던 혁신계건 그 운명은 장면정부와 다르지 않았다.박정희(朴正熙)시대에 ‘통일지상주의자’들은 자유당정권 때보다도 훨씬 가혹한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분단의 역사에서 통일은 우리 민족이 풀어야 할 가장 중요한 숙제임에 틀림없다.민주주의가 활짝 꽃핀 제2공화국에서 통일논의가 최고의 이슈로 떠오른 것도 자연스런 일이었다.
하지만 체제간 경쟁이 엄존한 현실을 무시하고 이상에만 치우친 통일론,자파(自派)의 세력 확장에 급급해 중구난방 식으로 쏟아부은 통일론은 급기야 스스로가 발디딘 토대마저 무너뜨리고야 말았다.
이용원기자 ywyi@
1999-04-27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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