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대한제국 이면사/철없는 임금(비록 남가몽:1)

격동의 대한제국 이면사/철없는 임금(비록 남가몽:1)

박성수 기자 기자
입력 1998-02-25 00:00
수정 1998-02-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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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첫 어명 “계동 군밤장수 처형하라”

대원군은 미친 사람 행세를 해가면서 와신상담 집권의 기회를 노리다가 1863년 마침내 둘째 아들 재황을 왕위에 올려 놓는데 성공하였다.이 분이 바로 조선 왕조의 마지막 왕인 고종이다.고종의 즉위식 날이 음력으로 12월13일이었으니 양력으로 따지면 대한민국 15대 대통령 취임식 날인 오늘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고종의 나이는 열두살 철없는 어린아이였다.만으로 따지면 10살 밖에 안되는 아이였으니 요즘 같으면 초등학교에 다녀야 할 나이다.그러나 고종 앞의 철종이 18살이었고 그 앞의 헌종이 8살,그 앞의 순조도 11살 나이로 등극하였으니 당시로서는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

○대원군 둘째 아들… 12세 즉위

왜 이렇게 어린아이들이 계속해서 왕위에 올랐느냐 하면 순조,헌종,철종 등 3대 60여년에 걸쳐 세도정치를 하던 안동 김씨가 의도적으로 어린 왕을 세워 권력을 전단하려 했던 탓이라 한다.그런 세도정치하에서 흥선군(흥선대원군은 고종 즉위 후에 부른 존칭)처럼 난처한 사람은 없었다.흥선군은 영조대왕의 현손(증손자의 아들)이었으니 유력한 왕위 계승권자였다.그러니 그는 안동 김씨들의 일급 요시찰 인물이었다.까딱하다가는 귀신도 모르게 죽는 몸이었다.말이 세도정치지 사실상 군사독재보다 더한 공포정치였다.그러니 철종 14년간은 대원군으로서는 살얼음 밟듯 조심하여 살아야 했던 눈물의 재야시절이었다.

흥선군의 사저는 최근 복원된 운현궁이다.말이 궁이지 아들이 왕위에 오르기까지는 흥선군이 거지나 다름없이 살았던 초가 삼간이었다.이 초가 삼간에 왕기가 서리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집터 때문이었다.터 좋은 데를 명당자리라 하지만 운현궁 자리는 그보다 더 좋은 왕후정승이 나는 터,대지였다.

운현궁 터에는 본시 관상대가 있었다고 하는데 관상대는 일명 서운관이라 했으므로 서운관의 구름 운자를 따서 운현궁이라 했다는 것이다. 관상대라면 천기를 엿보는 기관이다.왕이 되는 것은 천운을 타고나야 한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천기를 엿보는 고개마루의 초가집에서 왕이 났다.운현궁에 왕기가 서린다느니 또 성인이 난다느니하는 소문은 벌써 철종 초년부터 났었다.그러면 그럴수록 흥선군의 처신이 더 어려워져 마침내 탁질양광,옛날 양녕대군이 그랬듯이 온갓 미친 짓을 다하며 정신병자처럼 행세하여 안동 김씨의 눈을 속였던 것이다.

고종이 왕좌에 오르게 된 데에는 집터 말고 고종의 관상이 좋았다는 설도 있다.경상북도 청도에 사는 박유붕이라는 애꾸눈 관상쟁이가 있었는데,어느날 운현궁에 와서 고종 얼굴을 보더니 옆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물리치고 난 뒤 “왕이 될 관상이니 이 말을 절대 누설하지 마십시요”라고 했다고 한다.이 사람은 그 공으로 고종이 즉위하자 이듬해 경기도 남양부사와 수사로 임명되었다고 하니 관상보는 것도 출세의 한 방편이었다.

1863년 말 강화도령으로 이름난 철종이 나이 32살의 젊은 나이에 후사도 없이 죽게 되니 흥선군은 극비리에 조대비와 내통하여 전격적으로 후계자를 자신의 둘째 아들로 결정해 버렸다.즉위식은 지금의 창덕궁 안에 있는 인정문에서 거행되었다.

○“운형궁에 왕기 서린다”

“철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누가 대통을이을 것인지 논란이 많았다.중론이 분분하여 의견이 일치되지 않아 사슴(대권)이 누구의 손에 달려 있는지 알지 못하는 상황이었다.이와같이 의론이 분분하게 갈려 있는 시점에 조대비가 특별히 처분을 내려 운현궁의 흥선군 제2자 재황으로 대통을 잇게 한다는 명령을 내리니 누가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그리하여 12월 길일 양신에 고종이 보위에 오르니 만조 백관들이 모두 축하하고 만세를 불렀다.한쪽에서는 철종의 장례를 치르고 한쪽에서는 즉위식을 거행하니 조정의 백관들은 눈코뜰새가 없었다.”

그러나 이게 웬 일인가.철없는데다가 평소 굶주리며 자라온 고종이었기에 옥좌에 앉자마자 제일성으로 하는 소리가 계동에 사는 군밤장사를 잡아다 죽이라는 것이었다.

놀란 대신들은 황급히 제지하였다.

“전하가 지금 보위에 오르시어 성선의 덕으로써 정치를 하셔야 하는데 어찌해서 주살의 위엄을 먼저 보이십니까”

이에 고종은 반박하여 말하기를

“다른 이유는 없다.내가 여러 번 군밤 하나를 달라고 하였으나 한번도 주지 않았으니 이 어찌 인심이 그럴 수 있단 말인가.이같이 이익만 알고 의리를 모르는 자는 죽어 마땅하며 그럼으로써 다른 사람의 불선한 마음을 막아주어야 하는 것이다.어찌 내가 사사로운 감정을 가지고 그를 죽이려고 하겠는가.”

이 말을 듣고 대신 한 사람이 아첨하여 말하기를

“훌륭하도다! 왕의 말씀이시여.훌륭하도다! 왕의 말씀이여. 다른 사람의 불선한 마음을 막는다는 교를 내리시니 과연 임금의 도량에 알맞습니다.그러나 일개 하찮은 군밤장사를 효수하라는 것은 전하께서 처음 등극하신 자리에서 혹 국가의 화평한 기운에 미안한 일인 듯 생각됩니다.”

이에 수렴청정을 하게 된 조대비(신정왕후)는 교를 내리기를 “대신이 말씀드린 것은 금석과 같은 말입니다.그 효수하라는 명령은 거두어 들이시는 것이 타당할 것 같으니 짐짓 그만두고 논하지 않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했다.

이 말을 한 대신이 다름 아닌 안동 김씨 핵심인물이었는데 그 아첨하는 말솜씨는 후세의 정치인들에게 으뜸 가는 귀감(?)이 되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박성수 정문연 교수·한국사/번역=권오영 정문연 편수원>
1998-02-25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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