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디는 아이/하성란 소설가(굄돌)

견디는 아이/하성란 소설가(굄돌)

하성란 기자 기자
입력 1997-06-05 00:00
수정 1997-06-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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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입 입시반이 되기 전까지 우리는 교실을 야간에 수업을 받는 산업체 학생들과 같이 써야만 했다.보충수업이 끝나고 청소를 마칠 즈음이면 교실로 들어서던 그녀들과 맞부딪치고는 했다.근처의 방직 공장과 과자 공장에서 낮 근무를 마치고 헐레벌떡 뛰어오는 통에 복장은 단정치 않았다.우리들이 책상 줄을 맞추는 동안 그녀들은 서로의 머리를 땋아 주거나 단추가 떨어진 교복을 바느질하기도 했다.

촌스러운 밤색 교복도 그녀들의 풍만한 몸매를 숨길 수는 없었다.그도 그럴 것이 그녀들의 거의 과반수가 제 나이를 훌쩍 뛰어넘은 과년한 처녀들이었다.발육이 덜 된 나무젓가락 같던 중학교 일년생이 넘볼수 없는 것을 가지고 있었다.향기가 섞인 화장수 냄새와 일터에서 묻어온 냄새에 섞여 노상 땀냄새가 났다.그 땀냄새는 내 짝 체육복에서 풍기던 냄새와는 분명히 달랐다.

나와 책상을 같이 쓰던 언니는 가끔 책상 서랍 속에 노트며 모나미 볼펜 따위를 흘려두고 갔다.노트의 글씨들은 졸음 탓인지 가끔씩 칸을 넘고 알아볼 수 없었다.한번은 노트 갈피에서쓰다 만 편지지를 발견했다.부모님 전상서로 시작되는 글 속에는 부모의 건강에 대한 염려와 감자는 얼마나 수확했느냐는,일손은 모자라지 않았느냐는 이야기가 들어 있었다.모르긴 해도 그녀의 시골집에는 그녀의 월급을 기다리는 동생들이 감자알들보다도 더 많을 거였다.

입시반이 되면서 교실을 독차지할 수 있었다.서랍 속에 비밀 일기장을 넣어둘 수도,무거운 참고서를 가지고 다니지 않아도 좋았다.밤 늦게까지 공부를 하고 교문을 나설 때면 그때까지도 산업체 교실의 창 쪽에서는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그때까지 나는 견디는 아이입니다」라는 동시의 한 구절처럼 불빛은 영글어가고 있었다.

조간을 뒤적이면서 나는 그녀들에게서 풍기던 그 땀냄새가 몹시도 그립다.

1997-06-05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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