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 민주시민의 덕목은 무엇인가/김태길(서울신문 50돌 특집)

선진 민주시민의 덕목은 무엇인가/김태길(서울신문 50돌 특집)

김태길 기자 기자
입력 1995-11-22 00:00
수정 1995-11-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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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사는 지혜 모으자/남의 권익·환경을 먼저 생각할때 갈등 사라진다

「적자생존」은 생물의 세계를 지배하는 만고불변의 기본원칙이다.인간의 경우도 예외일 수는 없으며 환경적응에 성공하는 개인과 집단은 번영하는 반면에 이에 실패하는 자는 멸망의 길을 밟게 마련이다.생물계의 적자생존.이것은 매우 엄숙하고 잔인한 현상이다.

인간 이외의 다른 생물에게는 자연환경이 그들의 적응을 요청하는 환경의 거의 전부다.그러나 인간에게는 사회환경이라는 또 하나의 부담이 있으며,인간 스스로 만들어내는 이 사회환경에 어떻게 적응하느냐 하는 것이 삶의 과정에서 개인과 집단이 해결해야 할 가장 어렵고 중대한 문제다.인간의 미묘한 의식구조와 복잡한 신뢰구조가 인간 자신에게 어려운 문제를 안겨주고 있는 것이다.

현재 우리 한국은 나라 안팎으로 어려운 문제가 많은 시기에 처해 있다.이 어려운 문제의 대부분은 국내와 국제의 사회환경에서 유래하는 문제다.과학기술의 놀라운 발달로 지구가 날로 좁아지는 가운데 집단과 집단,개인과 개인,또는집단과 개인 사이에 이해관계가 폭넓게 얽히게 되어 넓은 의미의 사회환경이 과거 어느 때보다도 적응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넓은 의미의 사회환경이 과거 어느 때보다도 다사다난하다는 것은 우리가 해결해야 할 삶의 문제가 그만치 어려워졌음을 의미하며 우리의 조상이 숭상하던 전통·윤리의 덕목만으로는 이 시대를 성공적으로 살아가기가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덕목을 요구하는 것이다.

한국이 장차 해결해야 할 복잡다난한 문제상황을 요약해서 말하기는 어려운 일이다.우리의 기본적 공동과제 가운데서 큰 것 몇가지만 우선 꼽아보기로 하자.첫째로 우리나라는 민주적 사회질서의 확립이라는 기본목표도 아직 달성 못한 단계에 머물러 있다.민주사회란 본래 개인주의에 입각한 사회이기는 하나 이기주의를 초월한 높은 수준의 인간상을 전제로 할 때 실현이 가능하다.쉽게 말해서 「나」라는 개인의 자유와 권익을 존중하듯이 「남」의 자유와 권익도 한결같이 존중하는 사람만이 민주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그러나오늘의 우리 한국에서는 내 생각에만 골몰하고 남의 생각은 염두에 두지 않는 사람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둘째로 우리 민족은 남북의 통일이라는 거대한 과제를 눈앞에 두고 있다.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로 우리 민족은 이 한반도 위에 하나의 국가를 세우고 1천3백년 가까운 역사를 형성해왔다.강대국의 무책임한 흥정에 의하여 국토가 남북으로 분단된 지 반세기에 이르거니와 언어와 풍습,민족정서,그리고 경제적 여건과 국제적 관계등을 고려할 때 우리의 국토는 마땅히 통일되어야 한다.그러나 그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현실은 만족스러운 통일을 저해하는 여러가지 장애요인이 앞을 가로막고 있다.

셋째로 우리는 「세계화」라는 말로 상징되는 국제적 개방과 무한경쟁의 거센 물결을 타고 넘어야 한다.통신과 교통수단의 놀라운 발달로 세계가 날로 좁아져가는 가운데 국제교류가 빈번해지고 국제간의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는 추세를 보인다.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한국은 한편으로 우리의 자주성을 지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초국가시대에 적합한 개방된 자세로 인류번영에 이바지해야 한다.

위에서 말한 세가지 과제는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동일한 덕목이 두세가지 과제의 달성을 위해서 공통으로 요구될 경우가 많다.이제 내면적으로 연걸되어 있는 세가지 과제를 염두에 두고 21세기를 내다보는 우리에게 요구되는 주요덕목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기로 한다.

첫째로 강조해야 할 덕목은 공정성이다.인간이란 대체로 자기중심적 성향을 가지고 있거니와,특히 개인주의가 지배하는 현대사회의 경우는 각자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함에 집착하기 쉽다.각 개인의 자애심이 강한 것이다.자애심은 매우 자연스러운 심정이기는 하나 각자가 자신의 편의와 이익만을 추구하고 타인의 존재를 안중에 두지 않을 경우에는 사회는 질서를 잃고 혼란에 빠지게 되어 모든 사람이 결국 불이익을 받게 된다.이기주의의 역리현상이다.이러한 모순을 막기 위해서는 나와 남을 다같이 위하는 공정성의 덕목을 함양해야 한다.

공정성 덕목의 바탕이 되는 것은 합리적 사고다.나의 권익이 소중하다면 남의 권익도 소중하다고 보는 것이사회에 맞는 생각이며,사회에 맞도록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은 자연히 공정성을 중요시하게 된다.그리고 각자가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서로가 모두 불이익을 당하는 것은 불합리한 일이다.나와 남의 권익을 공정하게 존중함으로써 긴 안목으로 볼 때 모두가 뜻을 이루는 편이 사리에 합당하다.그러므로 공정성의 덕목은 당장의 이익보다도 긴 안목으로 세상을 내다보는 사려깊음과도 일맥 상통한다.

둘째로 강조해야 할 덕목은 근면과 절약이다.남북의 통일을 원만하게 달성하기 위해서 우리는 많은 경제력을 비축해야 하며,이 목표를 위해서는 근면과 절약이 필수적이다.세계화시대의 치열한 국제경쟁에 견디기 위해서도 창의성과 아울러 근면과 절약의 미덕이 발휘되어야 한다.뿐만아니라 근면과 절약은 많은 자원과 깨끗한 자연이 보존된 지구를 후손에게 물려주기 위해서도 지극히 소중한 미덕이다.

셋째로 강조되어야 할 덕목은 넓은 의미의 「사랑」­인간과 자연에 대한 폭넓은 사랑이다.현대문명의 근본적 문제점은 소유와 향락이 대표하는 외면적 가치가 생명과 예술 또는 학문이 대표하는 내면적 가치를 압도하는 뒤바뀐 가치풍토에 있다.그리고 이 그릇된 가치풍토는 인간과 자연에 대한 사랑의 결핍을 수반하였다.외면적 가치의 숭상이 인간과 자연에 대한 사랑의 결핍을 초래한 것인지,사랑의 결핍이 외면적 가치의 숭상을 초래한 것인지 그 인과의 선후를 밝히기는 어려우나 이 두가지 현상은 표리의 관계를 이루고 현대문명을 위기로 몰아가고 있다.

자연과 인간에 대한 사랑은 긴 안목으로 볼 때 나 자신에 대한 올바른 사랑의 길이기도 하다.나를 희생하고 남을 위한다는 가르침은 현대인에게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그러나 자연과 인간에 대한 사랑이 결국은 나 자신을 사랑하는 길이기도 하다는 인식에 도달할 때,사람은 아무 마음의 갈등도 없이 그 길을 선택하게 될 것이다.

인간과 자연에 대한 사랑은 우리의 전통·윤리가 숭상한 대부분의 덕목을 그 안에 포섭할 수 있다.다행히 인간과 자연에 대한 사랑이 우리 마음속에 가득하다면 우리는 조상이 숭상하던 주요덕목들을 현대상황에맞도록 재해석하여 실천에 옮길 수 있을 것이다.예컨대 여러 전통론자가 거듭 강조하는 효도 인간에 대한 폭넓은 사랑속에 포섭되어 살아나게 될 것이다.인간에 대한 폭넓은 사랑을 가진 사람이 제 부모를 소홀히 여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인간에 대한 폭넓은 사랑 없이 제 부모만 생각하는 속 좁은 효는 가족적 이기주의에 빠져서 현대적 민주사회에 역행할 염려가 있다.그러나 인간에 대한 폭넓은 사랑을 바탕에 둔 효사상은 현대의 민주시민을 위해서도 매우 소중한 덕목이 될 것이다.

□약력

▲75세,아호 우송 ▲현 학술원회원(윤리학) ▲서울대 철학과 명예교수 ▲철학문화연구소 이사장 ▲한국방송공사 이사장 ▲수필문우회장 ▲우산육영회 이사장
1995-11-22 3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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