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나다/투우장의 열광(아랍서 지중해까지:12)

그라나다/투우장의 열광(아랍서 지중해까지:12)

서영은 기자 기자
입력 1994-08-14 00:00
수정 1994-08-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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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난 소 돌진때마다 관중 함성/죽음앞 투우사의 공포 대리체험… 소 쓰러지면 광기는 절정에

스페인영화 「피와 모래」에는 다음과 같은 인상적인 다이얼로그가 나온다.데뷔전을 앞두고 있는 투우사 후안 가이알도와 그를 가르친 조수는 한밤중에 경기장을 둘러보고 있다.

조수­여기다.여기가 스페인에서 가장 유명한 라마이스트란자 경기장이다.어떠냐?

가이알도­느낌이 다르군요.관중이 없어서요.

조수­관중이 있건 없건 마찬가지야.경기장에서 너는 혼자다.너와 수소와 너를 괴롭히는 공포뿐이야.관중은 보이지도 않을 거야.

가이알도­나는 무섭지 않아요.

조수­실력이 없어서가 아니라,위험을 알아야 한다.공포를 알아야 살 수 있어.돈이 아니라 생명을 거는 거야.관중은 네가 죽음과 가까워지는 걸 지켜보는 거야.공포가 너의 유일한 친구야.

가이알도­말했잖아요.나는 무섭지 않아요.

5월3일,하오5시20분쯤 그라나다시 외곽에 있는 투우장에 도착했다.그날은 닷새 동안 계속된 축제의 마지막 날이었다.마침 축제기간에 그라나다를 방문했던 것이,투우를 볼 수 있는 행운으로까지 이어졌다.

경기장 바깥에는 관객들이 타고온 승용차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고,입장을 기다리는 사람들,표를 구하려는 사람들,관계자들이 북적거리고 있었으나,어딘지 한산한 느낌이었다.그들이 보기에 일급 투우사가 나오는 경기가 아닌 모양이었다.

○그늘진 쪽이 1등석

우리가 일인당 4천 페세타씩 주고 산 입장권은 그늘쪽의 2층석(솜브라 그라다)이었다.자리를 찾아 앉고보니,투우장에서 양지와 그늘의 차이는 아주 무자비했다.작열하는 햇빛이 강렬한만큼,그늘은 짙고 서늘했다.때문에 원형 경기장의 스탠드 상단이 만든 그늘 속에 잠겨있는 좌석과 햇빛을 정면으로 마주보는 좌석은 그늘과 양지이기 이전에,가진자와 못가진자로 대비되고 있었다.그늘(Sombra)과 양지(Sol)가 스페인 사회를 부와 빈으로 이분하는 대명사가 되기도 한다는 뜻을 실감할 수 있었다.(우리와 반대개념인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그날의 관람석 대비는 그늘과 양지겸 그늘(시작할 때는 양지이나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그늘로 변하는 자리)쪽이 거의 가득 차 있는데 반해 순전히 양지쪽은 빈 자리가 많았다.

투우는 경기 당일 바람의 방향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지만 대체로 그늘쪽 일층석(바레라) 앞에서 벌어진다.그곳엔 전주들과 유명인사들,투우관계 전문가들이 자리잡고 있다.영화나 소설에서는 열애에 빠진 투우사가 바레라에 앉아있는 자기의 연인에게 투우 시작전 망토를 벗어주고 소를 살해하기전 목숨을 건 사랑의 징표로 소의 죽음을 바친다는 뜻으로,모자를 벗어 어깨 너머로 던져주는 장면을 종종 볼 수 있다.

마침내 입장을 알리는 나팔소리가 울렸다.백마를 탄 두 사람의 검은 기사의 선도를 받으며 세 사람의 투우사(마타도르),아홉명의 단창잡이(반데릴레로),네명의 말탄 창잡이(피카도르),그리고 죽은 소를 끌어내가는 세 필의 말과 말몰이꾼들,검은 바지에 붉은색 상의 차림의 투우시중꾼들이 세 줄로 나란히 서서 입장했다.

○소의 운명에 비애감

투우사와 단창잡이들은 왼쪽 어깨에만 걸친 카포테(한쪽은 분홍색,다른 한쪽은 노란색 플란넬 천으로 만든 케이프)를 팔꿈치 밑에감아서 한껏 맵시를 뽐내고 있었다.본부석에 인사를 하고 나서 그들은 차례로 바레라와 투우장울타리 사이의 좁은 통로(칼레혼)로 들어갔다.그와 동시에 투우사와 단창잡이들이 일제히 펼쳐든 분홍색 카포테가 관중의 마음을 긴장시켰다.

수소의 출현을 알리는 힘찬 나팔소리.관중석이 술렁거렸다.날카로운 커다란 뿔을 가진 검은 수소 한 마리가 꼬리로 제 뒷다리를 후려치면서 경기장 안으로 달려나왔다.잘 다져놓은 모랫바닥이 깊숙이 패이면서 수소가 질주할 때마다 모래바람을 날렸다.하얗게 빛나는 모래바닥에 드리워진 고독한 그림자가 섬뜩한 비애를 느끼게 했다.타고난 본능적 힘 때문에 인간으로부터 대결의 표적이 된 비극적 동물.

첫번째로 출연하는 투우사와 그를 보조하는 세 사람의 단창잡이들이 번갈아가며 카포테 깃을 잡고 돌진해오는 수소를 살짝살짝 피하기(베로니카)를 여러차례.그때마다 관중석에서는 「호레이」를 외치며 투우사의 전의를 부추겼다.투우사는 이 베로니카를 통해 수소의 성질·힘·달리는 속도를 파악한다고 한다.

말을 탄피가도르가 등장한 것은 그 다음이었다.제 힘에 겨운듯,뿔로 경기장 울타리를 들이받아보던 수소가 말이 있는 쪽으로 둘진했다.말은 얼굴과 몸에 보호대를 하고 있었으나,소가 날뛸 때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것 같았다.소가 말을 받으려는 아슬아슬한 순가에 피카도르는 창끝으로 수소의등을 내리찍었다.가죽처럼 매끄러운 검은등을 타고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등에 상처를 입어 약이 오른 수소가 또다시 말을 공격했다.달아나는 말을 뒤쫓아 수소는 보호벽 안으로까지 달려들어갔다.투우사가 그앞으로 가서 카포테로 소를 유인해 끌어냈다.

그 다음은 단창잡이들 차례였다.단창은 7㎝정도에 알록달록한 장식이 달려 있다.단창잡이들은 한사람이 한쌍의 단창을 수소의 목덜미에다 꽂았다.소의 들은 흘러내리는 피로 붉게 젖었다.

마침내 투우사가 칼과 무레타(붉은천)를 가지고 등장했다.

멀리서 보기에 그것은 아주 선연한 붉은색이었으나,실제로는 때가 묻어 우중충하고,소가 흘린 핏자국으로 얼룩져 있다고 한다.또한 바뀌는것을 막기 우해 각자의 이름이새겨져 있다.투우사에게 있어 무레타는 자신의 생애,피와 땀,고뇌와 고통,투혼이 남김없이 새겨져 있는 벽화와 같은 것이다.

헤밍웨이의 「태양은 또다시 떠오른다」중에는 일급 투우사에 관한 묘사가 나온다.

「로메로는 난폭한 동작을 피하고,수소의 기분을 혼란시키거나 숨을 헐떡이게 하지 않고 천천히 힘을 소모시킨다.그는 어떤 경우에더 수소 곁에서 움직인다.그는 절대로 몸을 비틀지 않는다.그의 몸가짐은 항상 꼿꼿하고 순수하며 자연스러운 선을 유지한다」

투우를 처음보는 내 눈엔 우리의 투우사가 어는 정도의 실력을 가진 사람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어쨋든 그의 자세는 비교적 꼿꼿하고 침착해 보였다.

투우에는 소의 영역과 투우사의 영역이 있다고 한다.투우사가 자신의 영역에 머물러 있는 한 비교적 안전하고,소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만큼 위험이 커진다.「한창 때의 벨몬테는 언제나 소의 영역에서 투우를 했다.그는 이렇게 하여 비극이 닥쳐오는 흥분을 관중에게 안겨주었다.관중은 벨몬테를 보기 위해서,비극적인 흥분을 맛보려고,혹은,벨몬테의 죽음을 지켜보려고 투우장으로 오는 것이다.15년전에는 벨몬테를 보고 싶으면 그가 살아있을때 빨리 가보는게 좋다는 말까지 있었다.그 이후 그는 천마리도 넘는 소를 죽인 것이다.-해는 또 다시 떠오른다 중에서-

○경기장 핏자국 선명

무지한 나의 눈에도 우리의 투우사는 절대로 자기의 영역을넘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관중은 그의 무난한 연기에 만족하는 듯이 보였지만 스스로에 대한 불만스러워 하는 자기자신의 눈길만은 결코 피할 수 없을 터였다.

어쨌든 그는 칼자루만 남긴채 긴칼을 수소의 목덜미에 깊숙히 박아 넣음으로써 수소의 육중한 몸을 모래바닥 위에 쓰러뜨렸다.세 필의 말이 나와서 죽은 소를 끌어내간 자국이 피의 피륙을 경기장에 펼쳐놓은 것처럼 선명했다.

관중석에는 열광하는 함성과 하얀 손수건의 물결이 출렁거렸다.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경기장에서 빛이 사라질 때까지 아직 다섯마리 수소의 죽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비극적 흥분을 선사하기 우해.

그들의 그런 야만적(?) 향연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스페인의 하늘아래서 햇빛으로부터 무자비하게 쫓겨보아야 알 수 있을 것같다.땅도 집도 모두가 하얗게 타오른는 정오,나는 사크로몬테(집시의 마을)언덕에 서있었다.

한낮의 끓어오르는 죽음같은 열기에 존재감을 몽땅 빼앗기고 자신이 텅 비어버리는 아득한 현기증.몸에 상처를 내어서라고 존재감을,현실감을 되찾고 싶어지는 이상한 광기의 꿈틀거림.

투우는 수소와 맞서 죽음의 공포앞에 자기를 던짐으로써 비극적 흥분이 불러일으키는 존재의 확인의식이랄 수 있다.무레타는 우우사의몸 구석구석을 핥듯이 스치는 면도날같은 공포의 혀이다.아이러니컬하게도 살았음의 존재감은 바로 그때 가장 극명해진다.스페인 관중은 투우사를 통해 그 공포르 대리체험하려는 것이다.<서영은·작가>
1994-08-14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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