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모·스탈린의 합작극」 드러나/「정쟁발발책임」관련 논쟁에 종지부
정부가 20일 공개한 6·25 관련 러시아외교문서는 북한이 궤변으로 주장해온 남침설이 재론의 여지가 없는 허구임을 공식입증한 귀중한 사료들로 평가되고 있다.죽은 김일성이 6·25의 전범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확인해주는 것과 함께 6·25에 대한 일부학계의 해묵은 논쟁이 얼마나 그릇된 것인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들 문서는 6·25가 발발하기 전인 49년1월부터 전쟁이 끝난 53년9월까지 4년8개월동안의 생생한 기록이다.크게 나눠 49년1월부터 53년7월까지 1백건에 이르는 6·25의 문헌자료와 49년1월부터 53년9월까지 1백16건 이르는 보충자료로 구성되어 있다.
내용은 6·25의 발발배경과 중공군의 참전과정,종전협상등 세 부분으로 분류할 수 있다.북한과 소련·중국이 주고받은 교신내용을 비롯,김일성과 스탈린·모택동 세사람이 벌인 전쟁모의및 준비과정은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가 어떻게 자행됐는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첫 발단은 지난 49년3월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남한에 대한 무력침공과 무력에 의한 통일에 관해 소련지도부의 의견을 물으면서 시작된다.처음에는 스탈린이 반대하는 자세를 취했다는 새로운 사실도 보여주고 있다.북한은 49년4월부터 50년3월까지 소련과 중공의 지원을 받아 북한군 증강작업에 착수했고,문서들은 그 내용을 적시하고 있다.
스탈린이 50년1월 김일성에게 유리하게 조성된 국제환경을 들어 북한의 전쟁개시에 동의하면서 중국과의 협의를 권한 내부보고서와 이에 따라 50년5월13일 김일성과 박헌영이 중국을 방문,모택동과 협의한 내용을 당시 주중소련대사인 로신이 스탈린에게 보고한 전문등도 새로운 자료들로 분류되고 있다.
특히 중공군의 참전과정부분은 귀중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그동안 간헐적으로 공개된 김일성이 스탈린과 모택동의 동의를 받아내는 과정과 중공군의 6·25 참전과정을 낱낱이 확인해주고 있다.맥아더장군이 이끄는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에 성공,서울을 수복한 직후인 50년9월29일 전황의 불리를 느낀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친서를 보낸다.친서에는유엔군이 38선을 넘어올 때는 소련군이 참전해야 하며 그것이 여의치 않더라도 중국등 사회주의국가들의 의용군을 보내줄 것을 요청한 사실이 김일성의 친서로 확인되고 있다.
이에따라 스탈린은 그해 10월1일 중공군의 파병을 권고하는 서한을 모택동에게 보내고,같은달 중국지도부가 참전에 대해 논란을 벌이는 과정이 숨김없이 드러나고 있다.중공군의 참전에 대해 주은래는 반대했으나 팽덕회등의 설득으로 정치국은 파병을 결정했다.같은달 24일 마침내 모택동은 『중국정부는 중공안보에 심각한 영향을 줄 미국의 한반도장악을 용납할 수 없다』는 식으로 참전의 구실을 찾았으며 같은달 26일 6·25의 첫 전투에 참가하게 되는 과정등이 문서를 통해 하나하나 확인됐다.
이 부분은 그동안 미확인상태에서 가설로 남아 있던 사실들을 확인해준 대목이다.때문에 전문가들과 국방전사연구소는 이 부분이 가장 가치있는 문서라고 평가했다.전문가들은 6·25사변은 김일성이 치밀한 준비를 하고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지원에 대한 사전동의를 얻어 개시한 남침전쟁이란 점을 다시 한번 확인했으며 이들 문서의 전달로 한국과 미국의 공동책임론을 주장해온 수정주의학파는 큰 타격을 입은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국방전사연구소측은 6·25연구,특히 전쟁계획의 전개과정에 관해 새롭고 중요한 정보가 포함되어 있다고 평가했다.특히 6·25가 김일성과 스탈린·모택동 세사람의 공동모의로 이뤄졌다는 사실을 공식확인하게 된 것은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설명이다.
실제 이들 문서의 공개는 새 정부의 신외교가 거둔 성과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김영삼대통령이 지난달 러시아방문 때 옐친 러시아대통령으로부터 직접 받아왔기 때문이다.그런 점에서 이 문서는 우리와 러시아 사이에는 「과거청산」의 의미까지 담고 있다.
아울러 우리 내부일각에 있는 소모적인 논쟁에 종지부가 찍힐 것으로 기대되기도 한다.<양승현기자>
정부가 20일 공개한 6·25 관련 러시아외교문서는 북한이 궤변으로 주장해온 남침설이 재론의 여지가 없는 허구임을 공식입증한 귀중한 사료들로 평가되고 있다.죽은 김일성이 6·25의 전범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확인해주는 것과 함께 6·25에 대한 일부학계의 해묵은 논쟁이 얼마나 그릇된 것인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들 문서는 6·25가 발발하기 전인 49년1월부터 전쟁이 끝난 53년9월까지 4년8개월동안의 생생한 기록이다.크게 나눠 49년1월부터 53년7월까지 1백건에 이르는 6·25의 문헌자료와 49년1월부터 53년9월까지 1백16건 이르는 보충자료로 구성되어 있다.
내용은 6·25의 발발배경과 중공군의 참전과정,종전협상등 세 부분으로 분류할 수 있다.북한과 소련·중국이 주고받은 교신내용을 비롯,김일성과 스탈린·모택동 세사람이 벌인 전쟁모의및 준비과정은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가 어떻게 자행됐는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첫 발단은 지난 49년3월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남한에 대한 무력침공과 무력에 의한 통일에 관해 소련지도부의 의견을 물으면서 시작된다.처음에는 스탈린이 반대하는 자세를 취했다는 새로운 사실도 보여주고 있다.북한은 49년4월부터 50년3월까지 소련과 중공의 지원을 받아 북한군 증강작업에 착수했고,문서들은 그 내용을 적시하고 있다.
스탈린이 50년1월 김일성에게 유리하게 조성된 국제환경을 들어 북한의 전쟁개시에 동의하면서 중국과의 협의를 권한 내부보고서와 이에 따라 50년5월13일 김일성과 박헌영이 중국을 방문,모택동과 협의한 내용을 당시 주중소련대사인 로신이 스탈린에게 보고한 전문등도 새로운 자료들로 분류되고 있다.
특히 중공군의 참전과정부분은 귀중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그동안 간헐적으로 공개된 김일성이 스탈린과 모택동의 동의를 받아내는 과정과 중공군의 6·25 참전과정을 낱낱이 확인해주고 있다.맥아더장군이 이끄는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에 성공,서울을 수복한 직후인 50년9월29일 전황의 불리를 느낀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친서를 보낸다.친서에는유엔군이 38선을 넘어올 때는 소련군이 참전해야 하며 그것이 여의치 않더라도 중국등 사회주의국가들의 의용군을 보내줄 것을 요청한 사실이 김일성의 친서로 확인되고 있다.
이에따라 스탈린은 그해 10월1일 중공군의 파병을 권고하는 서한을 모택동에게 보내고,같은달 중국지도부가 참전에 대해 논란을 벌이는 과정이 숨김없이 드러나고 있다.중공군의 참전에 대해 주은래는 반대했으나 팽덕회등의 설득으로 정치국은 파병을 결정했다.같은달 24일 마침내 모택동은 『중국정부는 중공안보에 심각한 영향을 줄 미국의 한반도장악을 용납할 수 없다』는 식으로 참전의 구실을 찾았으며 같은달 26일 6·25의 첫 전투에 참가하게 되는 과정등이 문서를 통해 하나하나 확인됐다.
이 부분은 그동안 미확인상태에서 가설로 남아 있던 사실들을 확인해준 대목이다.때문에 전문가들과 국방전사연구소는 이 부분이 가장 가치있는 문서라고 평가했다.전문가들은 6·25사변은 김일성이 치밀한 준비를 하고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지원에 대한 사전동의를 얻어 개시한 남침전쟁이란 점을 다시 한번 확인했으며 이들 문서의 전달로 한국과 미국의 공동책임론을 주장해온 수정주의학파는 큰 타격을 입은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국방전사연구소측은 6·25연구,특히 전쟁계획의 전개과정에 관해 새롭고 중요한 정보가 포함되어 있다고 평가했다.특히 6·25가 김일성과 스탈린·모택동 세사람의 공동모의로 이뤄졌다는 사실을 공식확인하게 된 것은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설명이다.
실제 이들 문서의 공개는 새 정부의 신외교가 거둔 성과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김영삼대통령이 지난달 러시아방문 때 옐친 러시아대통령으로부터 직접 받아왔기 때문이다.그런 점에서 이 문서는 우리와 러시아 사이에는 「과거청산」의 의미까지 담고 있다.
아울러 우리 내부일각에 있는 소모적인 논쟁에 종지부가 찍힐 것으로 기대되기도 한다.<양승현기자>
1994-07-21 9면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