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는 만주지배한 「한민족국가」/「고구려계승」 주변국인 신라·일본서도 인정/무덤의 양식·숱한 유물 등 고고학서도 입증
신라는 676년 3국을 통일한 뒤 935년 신흥국가인 고려에 항복했다.또 발해는 698년 건국돼 926년 거란에게 망했다.
「남북국시대」는 통일신라와 발해가 공존한 기간즉 698∼926년의 2백28년 동안을 뜻한다.
우리역사를 파악하는데 있어 이 시기를 「남북국시대」로 규정한 것은 최근 몇년사이의 일이다.이는 발해가 한민족의 국가로 받아들여진 결과이다.
그렇다면 발해가 최근에야 한민족의 국가로 받아들여진 까닭은 무엇인가.
발해가 건국 초부터 고구려의 후계자임을 자처했으며 신라·일본등 주변국들도 그 사실을 인정했음은 분명하다.
일본의 역사서인「속일본기」759년 기사에는『고려국왕 대흠무가 국서를 보냈다』는 부분이 나온다.이 때는 왕건이 고려를 건국(918년)하기 전으로 고려국왕은 고구려왕을 의미한다.
또 대흠무는 발해의 제3대 문왕(737∼793년)의 이름이다.따라서「속일본기」의 기사는 발해의 문왕이 고구려(고려)의 왕을 자처해 일본에 국서를 보냈고 일본측도 이를 받아들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밖에 일본 조정이 발해사신을 고구려사신이라고 불렀다든지 발해의 음악을「고려락」으로 표현하는등 일본이 발해를 고구려의 후계자로 본 사실은 여러 사서에서 인정된다.
한편 고고학적으로 보아도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그 대표적인 예가 1949년 길림성 돈화현 육정산고분군에서 발굴된 정혜공주(문왕의 둘째딸)의 무덤이다.
정혜공주묘는 돌방무덤(석실묘)인데다 무덤의 천장이 말각천장의 구조로 돼 있는등 전형적인 고구려 무덤양식을 그대로 실현했다.이밖에도 현재 발굴된 숱한 발해의 유물들이 문화면에서 고구려를 뒤이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발해가 고구려를 뒤이은 한민족의 국가임이 확실한데도 이를 인정받지 못한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통일신라이후 고려·조선등 역대 왕조가 스스로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3국의 항쟁신라에 의한 통일고려의 계승조선의 역성혁명」을 한국사의 주요흐름으로 강조해 온 점을 들 수 있다.이같은 입장에서는 신라와 같은 시기에 존재했던 발해가 한국사의 곁가지로 치부되거나 아예 무시될 수밖에 없었다.
이와 함께 발해 멸망후 그 본거지인 만주의 동북부일대가 민족의 주활동무대에서 벗어난 점도 발해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줄인 요인이다.
신라가 3국을 통일해 민족문화 발전에 큰 공헌을 한 것은 틀림없다.이와함께 당의 야욕을 무력으로 물리쳤다는 사실은 인*정받을만 하다.
그러나 외세를 끌여들여 통일을 추구했다든가 그 결과 국토통일이 대동강이남에 국한됐다는 점에서 그 한계성도 분명하다.
만주는 발해가 멸망한 뒤로 지금까지의 1천여년동안 한민족의 역사무대에서 사라졌다.그러나 고조선에서 고구려를 거쳐 발해에 이르기까지 그곳은 수천년간 우리의 땅이었다.
발해의 역사를 되찾는 것은 잃어버린 민주사의 일부를 회복하는 작업이랄 수 있다.<이용원기자>
신라는 676년 3국을 통일한 뒤 935년 신흥국가인 고려에 항복했다.또 발해는 698년 건국돼 926년 거란에게 망했다.
「남북국시대」는 통일신라와 발해가 공존한 기간즉 698∼926년의 2백28년 동안을 뜻한다.
우리역사를 파악하는데 있어 이 시기를 「남북국시대」로 규정한 것은 최근 몇년사이의 일이다.이는 발해가 한민족의 국가로 받아들여진 결과이다.
그렇다면 발해가 최근에야 한민족의 국가로 받아들여진 까닭은 무엇인가.
발해가 건국 초부터 고구려의 후계자임을 자처했으며 신라·일본등 주변국들도 그 사실을 인정했음은 분명하다.
일본의 역사서인「속일본기」759년 기사에는『고려국왕 대흠무가 국서를 보냈다』는 부분이 나온다.이 때는 왕건이 고려를 건국(918년)하기 전으로 고려국왕은 고구려왕을 의미한다.
또 대흠무는 발해의 제3대 문왕(737∼793년)의 이름이다.따라서「속일본기」의 기사는 발해의 문왕이 고구려(고려)의 왕을 자처해 일본에 국서를 보냈고 일본측도 이를 받아들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밖에 일본 조정이 발해사신을 고구려사신이라고 불렀다든지 발해의 음악을「고려락」으로 표현하는등 일본이 발해를 고구려의 후계자로 본 사실은 여러 사서에서 인정된다.
한편 고고학적으로 보아도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그 대표적인 예가 1949년 길림성 돈화현 육정산고분군에서 발굴된 정혜공주(문왕의 둘째딸)의 무덤이다.
정혜공주묘는 돌방무덤(석실묘)인데다 무덤의 천장이 말각천장의 구조로 돼 있는등 전형적인 고구려 무덤양식을 그대로 실현했다.이밖에도 현재 발굴된 숱한 발해의 유물들이 문화면에서 고구려를 뒤이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발해가 고구려를 뒤이은 한민족의 국가임이 확실한데도 이를 인정받지 못한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통일신라이후 고려·조선등 역대 왕조가 스스로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3국의 항쟁신라에 의한 통일고려의 계승조선의 역성혁명」을 한국사의 주요흐름으로 강조해 온 점을 들 수 있다.이같은 입장에서는 신라와 같은 시기에 존재했던 발해가 한국사의 곁가지로 치부되거나 아예 무시될 수밖에 없었다.
이와 함께 발해 멸망후 그 본거지인 만주의 동북부일대가 민족의 주활동무대에서 벗어난 점도 발해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줄인 요인이다.
신라가 3국을 통일해 민족문화 발전에 큰 공헌을 한 것은 틀림없다.이와함께 당의 야욕을 무력으로 물리쳤다는 사실은 인*정받을만 하다.
그러나 외세를 끌여들여 통일을 추구했다든가 그 결과 국토통일이 대동강이남에 국한됐다는 점에서 그 한계성도 분명하다.
만주는 발해가 멸망한 뒤로 지금까지의 1천여년동안 한민족의 역사무대에서 사라졌다.그러나 고조선에서 고구려를 거쳐 발해에 이르기까지 그곳은 수천년간 우리의 땅이었다.
발해의 역사를 되찾는 것은 잃어버린 민주사의 일부를 회복하는 작업이랄 수 있다.<이용원기자>
1994-01-07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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