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역사·미술·음악사의 총합체”/「금동용봉향로」발굴의의를 말한다

“백제역사·미술·음악사의 총합체”/「금동용봉향로」발굴의의를 말한다

입력 1993-12-25 00:00
수정 1993-12-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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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도교사상에서 신앙·풍속까지 포용/“퇴폐로 내부붕괴” 기존의 시각 완전 불식/정밀투시촬영 통해 명문 찾아내면 획기적 자료

고대왕국 백제의 신비를 간직한 금동용봉봉래산향로의 출토는 무녕왕릉에 이은 백제강역 최대의 고고학발굴 성과로 꼽히고 있다.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인 충남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에서 출토된 이 향로는 특히 백제 후기 시대사연구의 귀중자료로 부각되었다. 이와 더불어 미술사 및 음악사·사상사·민속연구 등에도 큰 도움을 줄 것으로 학계는 전망했다. 그래서 서울신문은 이 향로의 발굴성과를 정리하고 학술적 의미를 부여하는 전문학자의 대담을 마련해보았다.

▲최몽용교수=한해가 저물어가는 마당에 부여에서 소위 박산로가 하나 나왔습니다.삼불 김원용선생이 돌아가신 것과 함께 올해 역사·고고학계의 큰 일로 기억될 것같습니다.이 박산로는 철저히 파괴되었으리라는 마지막 도읍지 부여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전혀 예기치 못했던 물건이 아닌가 합니다.해외에 내보내도 정말 손색이 없는 유물 하나를 건진 셈입니다.무령왕릉 발굴이후 최대의 경사입니다.그러나 나온 물건이 워낙 대단하다보니 유물에만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느낌입니다.박산로가 나온 배경도 좀 살펴봐야하지 않을까요.

▲이기동교수=그렇습니다.그동안 백제말기의 분위기는 퇴폐적인 것으로 묘사되곤 했습니다.그런데 문화는 국력에 비례하게 마련이지요.백제말기에 이런 탁월한 공예품이 나왔다는 점에 미루어보면 백제가 노쇠기에 접어들어 내부붕괴가 가속화되는등 지리멸렬해져 멸망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고구려의 경우도 말기인 6·7세기의 벽화를 보면 웅혼한 기상이 살아있어요.국력이 쇠퇴하면 미술이나 공예도 타락상을 보이는 법입니다.그러나 고구려나 백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특히 백제의 경우는 비록 전성기는 아니라 하더라도 한창 국력이 뻗어나가려는 즈음에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받았다고 보아야 합니다.

▲최교수=중국 한대에 박산로는 왕통을 잇는다는 상징성을 지닌 물건이었습니다.태자를 지명할때 박산로를 주었지요.또 박산로는 귀족도 아닌 왕의 무덤에서만 출토됐습니다.이렇게 볼때 비록 7백여년의 시차가 있지만 능산리 박산로는 백제의 왕과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박산로가 출토된 곳은 나성의 동문밖입니다.발굴유구를 보면 이 박산로는 그 자리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국가존망의 위기가 아니었으면 그런 곳에 묻혀있을리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이때문에 의자왕이 나당연합군에 패주하다가 묻었을 것이라는 추정이지요.당시의 다급했던 모습이 눈앞에 선합니다.

▲이교수=이 박산로의 제작시기는 6세기후반이라기보다는 7세기전반으로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물론 만들어놓고 오랫동안 간직했을 수도 있어요.하지만 백제말기에 해당하는 무왕과 의자왕시대는 사원의 건축이 활발했을뿐 아니라 공예도 융성했던 시기였습니다.박산로가 만들어진 시기도 그 연장선상에서 보아야할 것같습니다.

▲최교수=어떻습니까.이 향로가 앞으로 여러 방면의 학자들에게 일거리를 제공하지 않겠습니까.

▲이교수=그렇습니다.얼핏 생각해도 역사학과 미술은 물론 수많은 주악상은 우리 음악사를 규명하는데도 큰 도움이 되겠지요.여기에 불교와 도교사상등 신앙과 풍속까지를 포함했기 때문에 향로 하나가 수많은 과제를 안기고 있습니다.

▲최교수=얼마전 스위스에서 발견된 청동기시대의 미이라 하나가 생활연구에서부터 해부학까지 연구에 큰 진전을 가져온 것과 비슷하군요.이 박산로로 또 「백제의 얼굴」을 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지금까지 백제인의 얼굴이 드러나 있었던 것은 서산마애불과 산경문전 뿐이었어요.백제인의 얼굴이 부드러운 이미지를 지니고 있었던 것도 이때문이지요.부처님 얼굴이었으니까요.그런데 이 박산로의 인물상을 보면 악기를 타면서도 얼굴표정이 약간은 경색되어 있어요.

▲이교수=향로의 제작연대 추정과 무관치않은 지적입니다.그 시기는 결국 삼국항쟁의 마지막 고비였어요.장기간에 걸친 전란속에서 먹느냐 먹히느냐는 사활이 걸린 상황에서는 사람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나타나게 마련입니다.문화는 사회상을 반영하니까요.

▲최교수=한대 박산로가운데는 한사군설치의 주역인 무제의 형인 중산정왕의 능에서 1972년에 발굴된 것이 있습니다.기원전 154년에 즉위했다가 기원전 113년에 죽었지요.이것을 하한으로 이후 것은 중국에서는 나오지 않고 있어요.국립중앙박물관에는 유력자가 중국에서 얻어온 것으로 추정되는 낙랑시대 박산로가 있습니다.이것이 한반도에서 유일한 것으로 알려졌지요.한대 박산로와 능산리의 그것은 약 7백70년의 공백이 있습니다.둘은 몸체는 비슷하지만 뚜껑 위쪽의 봉황과 다리부분의 용은 완전히 다릅니다.그렇다해도 앞으로 능산리 박산로가 백제 것이냐 수입품이냐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결국은 백제가 그 주역으로 결론이 내려지리라는 생각입니다만.백제의 공예기술이 뛰어날 수밖에 없었던 배경은 이교수께서 깊이 연구하셨지요.

▲이교수=청동기시대의 청동기 장인은 왕이나 귀족에 버금가는 신분으로 대접받았습니다.신라의 경우에도 성덕대왕신종이나 황룡사종을 주조하는 전문기술자에게는 관직을 부여할 만큼 우대했어요.그들은 당당한 관인이었습니다.마르크스는 이들 기술자를 노예라고 생각했지만 절대 그렇지 않아요.제가 알기로는 백제의 경우는 공예가들에 대해 더욱 남다른데가 있어요.백제하면 와당이 떠오르지요.일본측 기록을 보면 6세기말 백제의 와박사와 노반박사를 초청했다는 대목이 있어요.노반박사는 뛰어난 금속공장에 대해 국가가 부여한 지위입니다.

▲최교수=사실 신라는 백제기술자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지요.

▲이교수=신라의 1급문화재라고 하는 것은 대부분 백제의 도움을 받았지요.황룡사탑을 백제의 아비지가 세웠다는데서도 알 수 있지요.경주의 안압지도 사실 사비성시대 부여의 궁남지를 모방해 만든 것입니다.

▲최교수=결국 그같은 백제의 기술자육성정책이 뛰어난 박산로를 만들 수 있게 했다는 결론으로 자연스럽게 이끄는군요.이제부터 문제는 박산로가 백제문화의 정수를 아낌없이 보여주었지만 그 기원을 어디서 잡아야 하느냐는 겁니다.냉정하게 백제문화가 어디까지가 본질적인 것이고 외부로부터는 얼마만큼의 영향을 받았느냐는 것을 따져보아야 하겠습니다.

▲이교수=백제의 역사나 문화에 있어 중요하게 고려해야하는 것은 그 지리적 위치입니다.육로로는 고구려를 통해 북방문화를받아들이고 바다로는 중국 특히 양자강이남 오·월의 문화를 받아들였어요.중국의 문화를 수입하는데도 북쪽의 야성적인 호주의 문화와 우아하고 섬세한 한주의 문화를 받아들여 융합시켰어요.

▲최교수=박산로에서도 백제적 요소가 많이 드러나지요.연화문과 산경문이 특히 그렇습니다.이것들은 백제의 심벌과도 같은 것이지요.

▲이교수=이 박산로를 보면 도교신앙이 의외로 백제의 민간이나 지배층에 유행하고 있지 않았나 생각됩니다.고구려의 경우 연개소문이 도교에 깊이 빠지는등 번창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백제나 신라는 남아있는 기록이 없어요.그러나 백제에서 도교가 성행했다는 것은 여러가지 자료를 통해 추측만을 했을 뿐이지요.근초고왕의 북진의욕에 대한 막고해장군의 『분수를 알고 나아가지 말자』는 진언이 그것입니다.또 무령왕릉 지석의 「불종율령」도 좋은 예가 되지요.「불종율령」은 「왕은 법을 초월하는 존재」라는 식으로 글자 그대로 해석하기도 했지만 사실은 마치 「수리수리마수리」와 같은 상투적인 도가적 주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일본의 우에다교수같은 학자는 일본의 고대도교도 백제에서 건너갔을 것으로 생각하더군요.능산리 박산로는 그 관계를 밝히는 유력한 물적자료가 될 것입니다.이처럼 사상적으로 볼때에도 이 향로는 백제의 진수를 보여주는데 모자람이 없습니다.

▲최교수=무령왕릉은 발굴결과 기록과 부합되었지요.이 향로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이교수=아직은 명문이 발견되지 않았다지요.그러나 명문이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칠지도와 일본 하치망의 인물화상경에서도 뒤늦게 명문이 발견됐지요.일본에 있는 가야의 환두대도에도 명문이 새겨져 있습니다.금속제품에는 이처럼 명문은 새기는 것이 상례입니다.능산리 박산로도 꼭 정밀투시촬영을 해보아야 합니다.여기서 명문이 확인된다면 그야말로 미술뿐 아니라 역사를 구성하는데도 아주 긴요한 자료가 될 것입니다.<정리=서동철기자>

▷긴급대담◁

□이기동

◇서울대문리대 사학과 동대학원졸업

◇경북대교수

◇현 동국대교수

◇저서:「신라골품제 사회와 화랑도」등 많음

□최몽용

◇서울대문리대 고교학과 동 대학원졸업

◇미하버드대 대학원(석,박사)

◇현 서울대교수

◇저서:「한국문화의 기원을 찾아서」등 많음
1993-12-25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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