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년전 수모 회상하며 분노의 눈물
일본 제국주의 만행에 희생당한 아시아 피해 당사국들의 모임 「정신대문제 아시아 연대회의」가 열린 11일 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 422호.
『보제이,얼굴이 낯이 익은 것 같네…』
『고도라지야에 안있었나』
『그래 맞다아이가』
초라하게 늙은 촌부 두명은 그순간 복받치는 설움을 가누지 못한채 얼싸안고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다.46년만의 가슴 저미는 해후였다.
일제 식민지하에서 우리 민족이 겪은 수난사의 가장 어두운 단면을 보여준 이 자리에서 다른 정신대할머니들도 남의 일 같지않아 울음을 삼켰다.
이번 회의에 증언자로 나섰던 김할머니(63·부산)는 뒤늦게 경남 합천에서 올라와 합류한 최할머니(73)를 보자 첫눈에 어딘가 낯이 익었다.그리고 반세기여전 태평양전쟁 당시 인도네시아 자바라는 생전 들은 적도 없었던 타국땅의 고도라지야 야전병원을 생각해 냈다.이들은 바로 그 병원에서 간호보조원으로 같이 일했고 귀국선에 타기 전 수용소생활도 함께 했던 정신대 출신 여인들이었다.
어린 나이에 정신대로 끌려와 적도 아래 자바의 더위와 싸우고 또 굶주림에 시달렸다.그보다 치가 떨린 것은 폭력을 앞세운 일본 침략군의 성적인 노리개가 되어 수년간 겪은 인간이하의 수모.꽃다운 나이에 이런 삶을 살아온 두 여인은 고도라지야 야전병원에서 만났다.호박에 주사놓기등 기본적인 간호교육을 받은뒤 일군 부상병을 돌보게 된것이었다.미군이 들어온 뒤 이들은 같은 수용소에서 1년정도를 함께 생활했다.김씨가 남양쪽에 징용으로 끌려와 먼저 수용소에 들어온 이종사촌 형부를 만나 먼저 배를 타고 부산으로 떠나면서 헤어졌다.
고향이 양산인 김씨는 16살때 헌병대에 잡혀간 아버지를 구해내는 대신 정신대에 지원,관동·홍콩·싱가포르·말레이시아를 거쳐 자바에까지 유전했다.거창에서 태어난 최씨는 돈을 벌기 위해 중국 목단강에 있는 고모를 찾아 갔다 그곳에서 일본인 민간업자에 의해 항구의 위안소로 끌려간 것이 결국 자바행이 됐다.
젊었을땐 그나마 남의집살이나 식당일등을 할 수 있었지만 이젠 어디 한군데 아프지 않은 곳이 없다고 했다.
남들처럼 결혼해서 아이를 둘 수도 없었다.피어나지도 못한 꽃봉오리가 지지도 못한채 말라버리듯 이들은 역사 뒤안으로 사라지고 있다.그러나 그 가해자들은 지금 말이 없다.
일본 제국주의 만행에 희생당한 아시아 피해 당사국들의 모임 「정신대문제 아시아 연대회의」가 열린 11일 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 422호.
『보제이,얼굴이 낯이 익은 것 같네…』
『고도라지야에 안있었나』
『그래 맞다아이가』
초라하게 늙은 촌부 두명은 그순간 복받치는 설움을 가누지 못한채 얼싸안고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다.46년만의 가슴 저미는 해후였다.
일제 식민지하에서 우리 민족이 겪은 수난사의 가장 어두운 단면을 보여준 이 자리에서 다른 정신대할머니들도 남의 일 같지않아 울음을 삼켰다.
이번 회의에 증언자로 나섰던 김할머니(63·부산)는 뒤늦게 경남 합천에서 올라와 합류한 최할머니(73)를 보자 첫눈에 어딘가 낯이 익었다.그리고 반세기여전 태평양전쟁 당시 인도네시아 자바라는 생전 들은 적도 없었던 타국땅의 고도라지야 야전병원을 생각해 냈다.이들은 바로 그 병원에서 간호보조원으로 같이 일했고 귀국선에 타기 전 수용소생활도 함께 했던 정신대 출신 여인들이었다.
어린 나이에 정신대로 끌려와 적도 아래 자바의 더위와 싸우고 또 굶주림에 시달렸다.그보다 치가 떨린 것은 폭력을 앞세운 일본 침략군의 성적인 노리개가 되어 수년간 겪은 인간이하의 수모.꽃다운 나이에 이런 삶을 살아온 두 여인은 고도라지야 야전병원에서 만났다.호박에 주사놓기등 기본적인 간호교육을 받은뒤 일군 부상병을 돌보게 된것이었다.미군이 들어온 뒤 이들은 같은 수용소에서 1년정도를 함께 생활했다.김씨가 남양쪽에 징용으로 끌려와 먼저 수용소에 들어온 이종사촌 형부를 만나 먼저 배를 타고 부산으로 떠나면서 헤어졌다.
고향이 양산인 김씨는 16살때 헌병대에 잡혀간 아버지를 구해내는 대신 정신대에 지원,관동·홍콩·싱가포르·말레이시아를 거쳐 자바에까지 유전했다.거창에서 태어난 최씨는 돈을 벌기 위해 중국 목단강에 있는 고모를 찾아 갔다 그곳에서 일본인 민간업자에 의해 항구의 위안소로 끌려간 것이 결국 자바행이 됐다.
젊었을땐 그나마 남의집살이나 식당일등을 할 수 있었지만 이젠 어디 한군데 아프지 않은 곳이 없다고 했다.
남들처럼 결혼해서 아이를 둘 수도 없었다.피어나지도 못한 꽃봉오리가 지지도 못한채 말라버리듯 이들은 역사 뒤안으로 사라지고 있다.그러나 그 가해자들은 지금 말이 없다.
1992-08-13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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