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 호텔마다 쿠웨이트난민 북적/나라잃은 국민답지않게 “호화판생활”/국권회복 무장투쟁엔 거의가 소극적
쿠웨이트 난민들을 처음 보면서 부자가 망해도 3년 먹고 산다는 우리 속담이 떠올랐다.
바레인ㆍ사우디아라비아ㆍ요르단에서 만난 쿠웨이트인들은 요르단에서 오랫동안 거주해 온 몇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호텔에 묵고 있었다. 남자들은 옐라비야(전통 아랍의상)을 깨끗하게 차려입고 호텔 커피숍이나 로비에 모여 한담을 나누거나 신문을 보면서 소일하고 있었고 부녀자들은 호텔구석에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들이었다.
이라크와 쿠웨이트에서 일하다가 넘어오는 아시아계 피란민이나 이집트인들이 이라크와 요르단의 국경도시 쿠웨이트에 묶여 물과 음식조차 제대로 먹지 못한채 땡볕밑에서 고생하고 있는 모습과는 너무 대조적이었다.
피란민이라고 하면 6.25 당시 부산 피란민이나 캄보디아난민,베트남의 보트 피플을 연상하기 쉬운 한국인에게 쿠웨이트 난민들의 모습은 차라리 경이로움에 가까웠다.
지금까지 1백92만 쿠웨이트국민 가운데 약 3분의 1이 쿠웨이트를 도망쳐 나오거나 국외체류중 침공사태를 만나 난민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들은 유럽과 중동각지에 흩어져 있는데 런던에 2만5천명,스페인에 1만5천명,이집트에 6만명,요르단에 3천명,사우디에 5만6천명이 체류중이라고 사우디에서 발행되는 아랍뉴스지가 9월초 보도했다. 하지만 쿠웨이트 난민에 대한 지원이 가장 확실한 GCC(페르시아만안협력회의) 6개국 쪽으로 쿠웨이트인들이 몰리고 있어 현재는 사우디ㆍ바레인ㆍ카타르ㆍUAE 등에 대다수가 모여 있는 상태다.
이들에 대한 지원은 우선 GCC지역의 경우 각국 정부가,그외 지역은 쿠웨이트 대사관이 맡고 있다.
사우디정부는 과거 팔레스타인사람과 기아난민이 속출한 수단 등을 돕기 위해 설립된 이슬람구호기구(IRO)를 통해 쿠웨이트난민을 전폭 지원하고 있다.
쿠웨이트인들이 묵고 있는 모든 호텔에는 IRO의 쿠웨이트구호위원회 소속 직원이 파견돼 있다.
사우디 제다시의 알 아무디호텔 한 군데에만 자녀까지 포함,2백78명의 쿠웨이트 난민들이 묵고 있었고 IRO로부터 사우디인 파드 바자비르씨가 뒷바라지를 위해 파견돼 있었다. 그는 사우디 정부가 IRO를 통해 숙식비 세탁비 일상 생활용품은 물론 유아용품에 이르기까지 쿠웨이트인들이 돈 한푼 안들이고 편안히 지내도록 모든 비용을 대고 있다고 말했다.
그 난민 가운데 공무원 출신의 하무드 알 사이디씨와 쿠웨이트투자청(KIA)에 근무하는 에마드 알무네이씨를 만나보았다.
알 사이디씨는 이라크 침공후 5일만에 가족과 함께 탈출했다며 적치하의 공포생활을 열거했다. 그는 이라크군이 느닷없이 문을 차고 들어와서는 쿠웨이트인들을 마구 때리거나 이유를 묻는 사람은 쏴 죽였다고 말하면서 사우디에서의 생활이 쿠웨이트만큼 행복하다고 말했다. 물론 근처에는 사우디인들이 여럿 있었지만 실제 거의 모든 생활이 완벽하게 보장되는 사우디생활이 불편할 리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무네이씨에게 『난민치고는 너무 호화로운 것 아니냐』는 질문을 던졌더니 피란초기에는 일류호텔에 묵었으나 망명정부가 절약할 것을 촉구해 2류호텔로 옮겼다며이만하면 볼썽 사나운 것은 아니지 않느냐는 표정이다.
여하튼 한 사람당 하루 50달러씩만 어림잡아도 사우디정부의 지원액은 미국의 군사비 못지 않을 것으로 보였다.
두 사람에게 『돌아가서 싸우지 왜 호텔에서 소일하느냐』고 질문하니 조금 난처한 표정이 된다. 말인즉슨 『정부가 싸우라고 하면 싸우겠다. 아직은 정부가 외교적 노력을 우선하고 있다. 싸울 준비를 갖추는데 시간이 필요한 것 아니냐』는 대답을 하지만 『총 쏴봤느냐』고 물으면 더 곤란한 표정이 돼 버린다. 옆에서 듣고 있던 한 한국교민이 과거의 쿠웨이트인들 같으면 자존심을 건드리는 질문에 화를 냈을텐데 궁색한 답변이나마 하는 것을 보니 나라 잃고 나서 풀이 많이 죽었다며 측은해 한다.
다란에서 만난 파하드 알 아즈미씨도 저항군에 왜 가담치 않느냐는 질문에 『아직 무기를 안줘서…』라고 궁색한 답변을 내 놓았다. 이점은 바레인에서 만났던 카말 아드난씨도 마찬가지였다. 영국을 관광여행하던 중 나라를 잃게 된 그는 기자의 질문에 다국적군이 주권을 회복해 주고 나서철수하기를 바란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요르단에서 만난 쿠웨이트인들의 사정은 또 달랐다. 요르단에는 내심 이라크에 동조하는 사람이 많은 편이라서 그런지 약 3천여명의 쿠웨이트 거류민이 6일 현재 5백명선으로 줄었다.
주요르단 쿠웨이트 대사관의 공보관 자말 모하메드씨는 2∼3주 후면 1백여명만 남을 것으로 전망했다.
그는 요르단 정부가 이라크 제재에 동참한데 대해서는 만족스러워 했지만 요르단의 분위기에 대해서는 적지않게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외교관답게 한국이 이라크 제재에 동참하고 주쿠웨이트 대사관을 폐쇄하지 않은데 대해 감사의 뜻을 한국민에게 전달하고 싶다는 그는 외국군 없이 주권회복이 가능하겠느냐는 질문에 대해 사담 후세인은 쿠웨이트인에게 뿐만 아니라 전세계,인류존재 자체에 위험한 인물이라고 우회적으로 답변했다.
자력으로는 나라를 되찾기 어렵게 된 쿠웨이트인들,그러면서도 돈도 많고 산유국의 지원도 대단해서 궁색하지 않게 지낼 수 있는 「부유한 난민들」. 또 일부 가난한 이웃나라 사람들로부터는 시샘을 많이 받고 있는 쿠웨이트인들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고 해야하는지 해답찾기가 무척 어려워 보였다.<암만(요르단에서)>
쿠웨이트 난민들을 처음 보면서 부자가 망해도 3년 먹고 산다는 우리 속담이 떠올랐다.
바레인ㆍ사우디아라비아ㆍ요르단에서 만난 쿠웨이트인들은 요르단에서 오랫동안 거주해 온 몇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호텔에 묵고 있었다. 남자들은 옐라비야(전통 아랍의상)을 깨끗하게 차려입고 호텔 커피숍이나 로비에 모여 한담을 나누거나 신문을 보면서 소일하고 있었고 부녀자들은 호텔구석에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들이었다.
이라크와 쿠웨이트에서 일하다가 넘어오는 아시아계 피란민이나 이집트인들이 이라크와 요르단의 국경도시 쿠웨이트에 묶여 물과 음식조차 제대로 먹지 못한채 땡볕밑에서 고생하고 있는 모습과는 너무 대조적이었다.
피란민이라고 하면 6.25 당시 부산 피란민이나 캄보디아난민,베트남의 보트 피플을 연상하기 쉬운 한국인에게 쿠웨이트 난민들의 모습은 차라리 경이로움에 가까웠다.
지금까지 1백92만 쿠웨이트국민 가운데 약 3분의 1이 쿠웨이트를 도망쳐 나오거나 국외체류중 침공사태를 만나 난민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들은 유럽과 중동각지에 흩어져 있는데 런던에 2만5천명,스페인에 1만5천명,이집트에 6만명,요르단에 3천명,사우디에 5만6천명이 체류중이라고 사우디에서 발행되는 아랍뉴스지가 9월초 보도했다. 하지만 쿠웨이트 난민에 대한 지원이 가장 확실한 GCC(페르시아만안협력회의) 6개국 쪽으로 쿠웨이트인들이 몰리고 있어 현재는 사우디ㆍ바레인ㆍ카타르ㆍUAE 등에 대다수가 모여 있는 상태다.
이들에 대한 지원은 우선 GCC지역의 경우 각국 정부가,그외 지역은 쿠웨이트 대사관이 맡고 있다.
사우디정부는 과거 팔레스타인사람과 기아난민이 속출한 수단 등을 돕기 위해 설립된 이슬람구호기구(IRO)를 통해 쿠웨이트난민을 전폭 지원하고 있다.
쿠웨이트인들이 묵고 있는 모든 호텔에는 IRO의 쿠웨이트구호위원회 소속 직원이 파견돼 있다.
사우디 제다시의 알 아무디호텔 한 군데에만 자녀까지 포함,2백78명의 쿠웨이트 난민들이 묵고 있었고 IRO로부터 사우디인 파드 바자비르씨가 뒷바라지를 위해 파견돼 있었다. 그는 사우디 정부가 IRO를 통해 숙식비 세탁비 일상 생활용품은 물론 유아용품에 이르기까지 쿠웨이트인들이 돈 한푼 안들이고 편안히 지내도록 모든 비용을 대고 있다고 말했다.
그 난민 가운데 공무원 출신의 하무드 알 사이디씨와 쿠웨이트투자청(KIA)에 근무하는 에마드 알무네이씨를 만나보았다.
알 사이디씨는 이라크 침공후 5일만에 가족과 함께 탈출했다며 적치하의 공포생활을 열거했다. 그는 이라크군이 느닷없이 문을 차고 들어와서는 쿠웨이트인들을 마구 때리거나 이유를 묻는 사람은 쏴 죽였다고 말하면서 사우디에서의 생활이 쿠웨이트만큼 행복하다고 말했다. 물론 근처에는 사우디인들이 여럿 있었지만 실제 거의 모든 생활이 완벽하게 보장되는 사우디생활이 불편할 리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무네이씨에게 『난민치고는 너무 호화로운 것 아니냐』는 질문을 던졌더니 피란초기에는 일류호텔에 묵었으나 망명정부가 절약할 것을 촉구해 2류호텔로 옮겼다며이만하면 볼썽 사나운 것은 아니지 않느냐는 표정이다.
여하튼 한 사람당 하루 50달러씩만 어림잡아도 사우디정부의 지원액은 미국의 군사비 못지 않을 것으로 보였다.
두 사람에게 『돌아가서 싸우지 왜 호텔에서 소일하느냐』고 질문하니 조금 난처한 표정이 된다. 말인즉슨 『정부가 싸우라고 하면 싸우겠다. 아직은 정부가 외교적 노력을 우선하고 있다. 싸울 준비를 갖추는데 시간이 필요한 것 아니냐』는 대답을 하지만 『총 쏴봤느냐』고 물으면 더 곤란한 표정이 돼 버린다. 옆에서 듣고 있던 한 한국교민이 과거의 쿠웨이트인들 같으면 자존심을 건드리는 질문에 화를 냈을텐데 궁색한 답변이나마 하는 것을 보니 나라 잃고 나서 풀이 많이 죽었다며 측은해 한다.
다란에서 만난 파하드 알 아즈미씨도 저항군에 왜 가담치 않느냐는 질문에 『아직 무기를 안줘서…』라고 궁색한 답변을 내 놓았다. 이점은 바레인에서 만났던 카말 아드난씨도 마찬가지였다. 영국을 관광여행하던 중 나라를 잃게 된 그는 기자의 질문에 다국적군이 주권을 회복해 주고 나서철수하기를 바란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요르단에서 만난 쿠웨이트인들의 사정은 또 달랐다. 요르단에는 내심 이라크에 동조하는 사람이 많은 편이라서 그런지 약 3천여명의 쿠웨이트 거류민이 6일 현재 5백명선으로 줄었다.
주요르단 쿠웨이트 대사관의 공보관 자말 모하메드씨는 2∼3주 후면 1백여명만 남을 것으로 전망했다.
그는 요르단 정부가 이라크 제재에 동참한데 대해서는 만족스러워 했지만 요르단의 분위기에 대해서는 적지않게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외교관답게 한국이 이라크 제재에 동참하고 주쿠웨이트 대사관을 폐쇄하지 않은데 대해 감사의 뜻을 한국민에게 전달하고 싶다는 그는 외국군 없이 주권회복이 가능하겠느냐는 질문에 대해 사담 후세인은 쿠웨이트인에게 뿐만 아니라 전세계,인류존재 자체에 위험한 인물이라고 우회적으로 답변했다.
자력으로는 나라를 되찾기 어렵게 된 쿠웨이트인들,그러면서도 돈도 많고 산유국의 지원도 대단해서 궁색하지 않게 지낼 수 있는 「부유한 난민들」. 또 일부 가난한 이웃나라 사람들로부터는 시샘을 많이 받고 있는 쿠웨이트인들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고 해야하는지 해답찾기가 무척 어려워 보였다.<암만(요르단에서)>
1990-09-09 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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