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을 설득시킨 게 아니라 오히려 설득당했습니다. 설득할 명분이 있어야죠.” 서울 노원구에 사는 강모(25·여)씨는 이번 대선에서 두 명의 소중한 지지표를 잃었다. 강씨는 대학생이던 2002년 대선 때 경상도 출신 아버지와 격론을 벌였다. 아버지는 “김대중이 실패했으니 이회창을 뽑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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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씨는 “노무현이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다.”고 맞섰다. 급기야 언성이 높아지고 아버지로부터 “어린 게 뭘 아느냐.”는 소리까지 들었다. 하지만 끈질긴 설득 끝에 아버지는 “그래도 서울에서 공부하는 딸내미 말이 맞겠지.”라며 노 후보를 찍어줬다.
하지만 이번 대선에선 전라도 출신인 어머니마저 아버지와 손을 잡고 이명박 당선자에게 표를 던졌다.“지난 대선 땐 아버지가 논리도 없이 한나라당만 지지해야 한다고 해 개혁적 가치를 내세울 수 있었죠. 하지만 이번엔 이명박 후보가 보수 색채보다는 ‘경제를 살려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는데 취업준비생으로 공감하는 측면이 없지 않아 일언반구도 하지 못했어요.”
2007년 대선은 2002년과 달리 자식 세대와 부모 세대의 ‘정치적 우월성’이 완벽하게 뒤집힌 채 막을 내렸다.2002년엔 ‘개혁’ 바람이 불어 자식들이 부모들을 설득하는 과정을 통해 진보적인 정권을 이끌어냈다면, 이번 대선은 부모들의 ‘경제 우선’ 논리에 비정규직과 취업전쟁에 시달리는 자식들은 입도 뻥긋할 수 없었다.
2002년 “이회창이 되면 서민이 힘들어진다.”며 어머니를 설득했던 회사원 박모(28·여)씨도 얼마전 어머니의 친구들과 식사하면서 ‘아줌마’들의 논리에 압도당했다.“아주머니들이 ‘우리라고 이명박씨를 좋아하는 줄 아느냐. 하지만 노무현 정권 5년 동안 서민 생활은 나아진 게 없다. 북한과의 관계만 생각하는 걸 보면 친북좌파보단 거짓말쟁이가 낫다는 생각이 든다.’고 하는 데 묘한 설득력이 있더군요.”
전문직 이모(26)씨도 부모가 “고생도 안 해본 젊은 애들이 생각 없이 투표하니까 나라 꼴이 이렇게 됐다.”고 질책하는 데 아무런 대꾸도 못했다. 이씨는 “노무현 대통령의 정책 방향이 잘못됐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어쨌든 지지세력을 확보하지 못한 것이 대통령의 리더십 부족에서 초래됐다고 보기 때문에 부모님을 설득할 수 있는 힘이 없었다.”고 말했다.
숭실대 정치외교학과 강원택 교수는 “미국과의 불평등한 관계나 정경유착, 지역주의와 권위적인 문화 등이 개선되면서 역설적으로 정치적 이슈는 퇴색하고 경제적 이슈가 도드라졌다.”면서 “부동산값 급등이나 교육정책의 실패, 젊은 세대의 비정규직 문제나 청년 실업 등도 ‘세대 반전’의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경성대 정치외교학과 안철현 교수는 “젊은 세대에게 가족의 행복이나 개인의 안정을 중시하는 문화가 만연하면서 이번 선거는 개혁이라는 거대 이슈가 떠오르지 않았다.”고 진단했다.
성공회대 정치학과 조현연 교수는 “노무현 대통령을 지지했던 표가 정동영·문국현·권영길 후보 쪽으로 가지 않고 이명박 당선자 쪽으로 간 건 그만큼 진보진영 연대가 서민과 중산층에게 아무런 희망을 주지 못했고, 그에 대한 자기성찰도 하지 못한 것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이자 실망”이라고 꼬집었다.
이재훈 이경주기자 nomad@seoul.co.kr
2007-12-20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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