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는 흔적을 남긴다> 시리즈는 굵직한 사건현장을 누빈 베테랑 현장 기자인 유영규 기자의 생생한 경험과 법의학 전문가들의 자문을 바탕으로 구성하는 서울신문의 특화 기사입니다. 서울신문은 기사 내용을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 AI 음성을 이용해 ‘범죄는 흔적은 남기다’ 연재물의 내용을 재구성했습니다.
사건관련 AI 생성이미지
100억분의 1g, ‘침묵의 목격자’가 비명을 지르다‘완전범죄’를 꿈꾸는 범죄자들과 ‘진실’을 쫓는 수사 당국의 두뇌 싸움은 마치 창과 방패의 대결과도 같다. 한 대 국내에서도 많은 인기를 누렸던 미국 드라마 시리즈는 아이러니하게도 수사 현장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드라마를 통해 법의학 지식을 습득한 범죄자들이 현장에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 치밀하게 계산하고 움직이는 탓이다. 지문은 닦아내고, 족적은 뭉개며, 머리카락 한 올조차 남기지 않으려 삭발을 감행하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접촉은 흔적을 남긴다’는 프랑스 법의학자 에드몽 로카르의 명제는 여전히 유효하다. 아무리 치밀한 범죄자라도 신이 아닌 이상 현장의 공기 흐름까지 통제할 수는 없다. 눈에 보이지 않는 아주 작은 무엇, 즉 100pg(피코그램·100억분의 1g) 단위의 극미세 증거가 남기 마련이다. 법의학계에서는 이를 ‘미세증거물(LCN·Low Copy Number)’이라 부른다. 현미경으로 들여다봐야 겨우 보이는 이 미세한 입자가 때로는 수백 명의 탐문 수사보다 강력한 ‘결정적 한 방’을 날린다. 2009년 충남 천안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모녀 살인사건은 이 미세증거물의 위력을 여실히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다.
핏빛으로 물든 아침, 처참한 살육의 현장2009년 3월 19일 오전 7시 38분, 충남 천안의 한 평온한 주택가. 정적을 찢는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골목을 울렸다. 소리에 놀라 밖으로 뛰쳐나온 이웃 주민 유 모(당시 70세) 씨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지옥도와 다름없었다.
옆집 앞마당에는 스무 살 딸이, 안방에는 마흔여덟 살 어머니가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있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119구급대가 도착했을 때 이미 모녀는 숨을 거둔 뒤였다. 사인은 과다출혈로 인한 쇼크사. 검시관들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로 시신은 처참했다.
범인의 공격은 잔혹하고 집요했다. 어머니의 시신에서는 목과 등 부위를 중심으로 무려 20여 곳의 찔린 상처가 발견되었고, 딸 역시 왼쪽 가슴과 팔 등 5곳이 예리한 흉기에 베여 있었다. 이는 단순 강도라기보다는 깊은 원한에 의한 면식범의 소행일 가능성을 강력하게 시사했다. 현장 곳곳에는 범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피 묻은 족적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고, 경찰은 이를 토대로 치정이나 원한에 의한 살인에 무게를 두고 수사에 착수했다.
현장에서 수거된 증거물만 200여 점. 혈흔 샘플만 150여 점에 달했다. 수사팀은 방대한 증거물의 양을 보며 사건이 조기에 해결될 것이라 낙관했다. 하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증거의 홍수 속 빈곤, 역설에 빠진 수사사건 발생 이튿날, 서울 양천구 신월동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원) 유전자분석실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천안에서 공수된 200여 개의 증거물이 분석대 위에 올랐다. 그러나 분석이 진행될수록 연구원들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증거의 홍수’가 오히려 독이 된 상황이었다.
통상적으로 살인 사건 현장에서 다량의 혈흔이 발견되면 범인의 DNA를 확보하기 쉬울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현장이 지나치게 유혈이 낭자할 경우, 피해자의 혈액이 범인이 남겼을지도 모를 미세한 흔적들을 덮어버리거나 오염시킨다. 피해자의 DNA가 범인의 DNA를 압도해버리는 ‘마스킹 효과(Masking Effect)’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 사건이 딱 그랬다. 수많은 혈흔 속에서 범인의 유전자는 검출되지 않았다. 용의선상에 오른 피해자 주변 인물 10명의 구강 상피세포를 채취해 대조했지만, 일치하는 사람은 없었다. 현장에 수없이 찍힌 족적 또한 범인의 발 사이즈 외에는 어떤 정보도 주지 못했다. 수사는 미궁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방대한 증거물 속에서 범인을 특정할 단서는 단 하나도 나오지 않는, 그야말로 ‘증거의 역설’이었다.
뒤뜰의 엽기적 흔적, ‘최후의 단서’에 걸다모든 과학적 분석이 벽에 부딪혔을 때, 국과원 연구팀은 사건 현장 감식 기록을 다시 꼼꼼히 살폈다. 그리고 피해자 자택 뒤뜰 화단에서 발견된, 지극히 이질적이고 엽기적인 증거물 하나에 주목했다. 바로 누군가 싸놓은 ‘대변’이었다.
경찰은 현장 감식 당시 대변 주변에 찍힌 족적이 거실 등 범행 현장에서 발견된 혈흔 족적과 문양이 일치한다는 점을 확인했다. 즉, 살인범이 범행 직전이나 직후의 현장에서 배변했다는 뜻이었다. 국과원은 이 ‘가장 더럽고 냄새나는’ 증거물에 마지막 희망을 걸기로 했다.
대변은 부패와 변질이 매우 빠르기 때문에 아이스박스에 냉장된 상태로 조심스럽게 이송되었다. 이제 과제는 하나였다. 이 대변 속에서 살인자의 DNA를 찾아내는 것. 하지만 이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반적인 상식과 달리 대변 그 자체는 음식물 찌꺼기가 소화되고 남은 부산물일 뿐, 사람의 DNA를 직접적으로 다량 함유하고 있지 않다. 더군다나 대변 속에는 수조 마리의 박테리아와 미생물이 들끓고 있어, 극미량의 인간 DNA가 존재하더라도 이를 분해하거나 오염시킬 가능성이 매우 높다. 따라서 대변 분석은 법의학적 난도가 높은 작업 중 하나로 꼽힌다.
냉동과 면봉, 그리고 100억 분의 1g의 싸움국가원은 정공법을 택했다. 목표는 대변 자체가 아니라, 대변이 배설될 때 장(腸) 내벽을 긁고 나오면서 묻어 나오는 ‘장 상피세포’였다. 대변의 내부보다는 표면에 범인의 체세포가 묻어 있을 확률이 높았다.
연구원들은 우선 대변을 영하의 온도로 꽁꽁 얼렸다. 시료의 변질을 막고 표면 작업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다음, 얼어붙은 대변의 표면을 면봉으로 꼼꼼하게 닦아내기 시작했다. 아주 미세한 세포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 위한 세심한 작업이 이어졌다.
면봉에 묻은 극미량의 시료는 원심분리기와 유전자 증폭기(PCR)로 들어갔다. PCR 기법은 미량의 DNA를 수만 배, 수억 배로 증폭시켜 분석 가능한 양으로 만드는 현대 생명공학의 마법이다. 숨 막히는 기다림 끝에 기계가 결과를 토해냈다. 분석기 모니터에 선명한 유전자 프로필이 떴다. 대변의 주인이자, 이 끔찍한 살인극을 벌인 범인의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유전자의 주인은 피해자 옆집에 사는 55세 남성 천 모 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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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이웃의 두 얼굴, 그리고 허무한 자백경찰은 즉시 천 씨를 긴급 체포했다. 그는 범행에 사용한 흉기와 피 묻은 옷가지를 몰래 버리려다 잠복 중이던 형사들에게 덜미를 잡혔고, 국과원이 제시한 DNA 증거 앞에서는 더 이상 발뺌할 수 없었다.
경찰 조사에서 드러난 범행 동기는 황당하고도 비극적이었다. 천 씨는 과거 절도죄로 수감 생활을 했던 전과자였다. 그는 “죽은 피해자가 내 과거 전과 사실을 알고, 이를 내 내연녀 등 주변 사람들에게 떠벌리고 다녔다”라며 “그것을 따지러 갔다가 무시당해 홧김에 살해했다”라고 진술했다.
그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고등학교 3학년인 아들이었다. 그는 “아들에게 아버지가 전과자라는 사실이 들통나는 것이 미치도록 싫었다”라며 고개를 떨구었다. 삐뚤어진 부성애와 열등감이 빚어낸 참극이었다.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의 얼굴 뒤에는 잔혹한 살인마의 본성이 숨어 있었다.
미세증거물, 보이지 않는 진실의 추적자이 사건은 ‘미세증거물’이 현대 과학수사에서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지를 증명한다. 미세증거물은 다양하다. 시신을 말았던 카펫의 올 한 가닥, 범인의 신발 밑창 틈새에 낀 흙먼지, 성폭력 피해자의 손톱 밑에 낀 가해자의 피부 조직, 차량 충돌 시 흩날린 페인트 조각 등이 모두 여기에 해당한다.
대변은 그중에서도 매우 특이한 사례다. 이는 단순히 신체의 일부가 떨어진 것이 아니라, 범인의 생리적 현상이 현장에 남은 것이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듯, 현대 법의학은 100pg(피코그램)의 DNA만 있어도 신원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 먼지 수준의 양이다. 범죄자에게는 공포스러운 일이지만, 수사관에게는 ‘양날의 검’이기도 하다. 너무 작아서 발견하기 어렵지만, 반대로 너무 작아서 범인이 미처 치우지 못하고 남길 가능성도 크기 때문이다. 또한 시료가 미세할수록 오염에 취약하기 때문에, 현장 보존과 채취 과정에서의 전문성이 무엇보다 요구된다.
에필로그: 살인마는 왜 현장에 변을 보았나사건은 해결되었지만, 한 가지 의문은 여전히 남았다. 도대체 천 씨는 왜 범행 현장, 그것도 남의 집 뒤뜰에 대변을 본 것일까?
이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로 갈린다.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한 형사는 ‘극도의 긴장감’을 원인으로 꼽았다. “본인은 우발적 범행이라 주장하지만, 흉기를 소지하고 찾아간 점으로 보아 계획적 살인이다. 아무리 대범한 범죄자라도 살인 직전에는 교감신경이 흥분하고 극도의 긴장을 하게 마련인데, 이 때문에 생리적 조절 기능에 이상이 생겨 급박한 신호가 왔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다른 시각은 범죄자들 사이의 ‘오래된 미신’에 주목한다. 절도 전과가 있던 천 씨의 이력을 근거로 든 한 수사 관계자는 “절도범들 사이에서는 ‘남의 집에 들어가 대변을 보고 물을 내리지 않거나, 현장에 배설물을 남기면 잡히지 않는다’는 속설이 있다”라며, “천 씨가 과거의 버릇이나 미신에 의존해 심리적 안정을 찾으려 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라고 추정했다.
긴장 탓이었든, 미신 때문이었든,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남긴 ‘가장 더러운 흔적’은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되어 그의 발목을 잡았다. 과학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완전범죄를 꿈꾸며 모든 흔적을 지웠다고 믿었던 그 순간에도, 100억 분의 1g의 DNA는 현장에 남아 억울하게 죽어간 모녀를 대신해 범인을 지목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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