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과 콘텐츠의 만남에서 관건은 역시 고전이다. 옛 사람들의 삶 자체가 ‘생생한 이야기’라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고전이야말로 콘텐츠의 ‘보물창고’이자 ‘광맥’이다. 이미 보물찾기는 시작됐다. 단 새로운 상상력이 가미돼야 한다. 그래서 잊혀진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인물이 부각된다. 군림했던 왕보다 잡초같던 백성들이 부상한다. 설혹 왕이라 해도 초인적인 면보다 인간적인 면이 부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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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는 과거를 바라보는 시선의 근본적인 변화가 놓여져 있다. 김호 경인여대 교수가 ‘무원록’을 발굴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변화 때문이다.80년대 ‘민중사’가 유행이긴 했는데 정작 민중의 목소리가 담긴 기록은 찾기 어려웠다. 그래서 조선사를 전공하면서 남들이 안보는 각종 의료·살인사건 기록들을 들췄다. 김 교수는 “이런 기록들은 당시 일반 사람들의 삶을 그대로 담고 있기 때문에 일종의 ‘조선민중실록’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강조했다. 국문학자 전봉관 카이스트 교수도 1930년대 문예지를 뒤지다가 ‘자본주의에 탐닉해가던 조선민중’을 발견했다.‘착취와 수탈’만 알고 있던 그에게는 충격이었다. 이를 정리한 게 최근 영화화가 논의되고 있는 ‘황금광시대’다. 이번에는 일제시대 살인사건과 스캔들을 묶어 ‘경성기담’도 펴냈다. 이 책은 아예 영화화를 전제로 시나리오 쓰듯 책을 꾸몄다. 그가 꿈꾸는 인문학은 “사람 냄새나는” 인문학이다.
영화 ‘왕의 남자’의 숨은 공로자였던 사진실 중앙대 교수도 마찬가지다. 국문학 전공자로 그의 관심사는 광대나 기생들의 문예활동이다. 그것들은 당대 민중의 욕망을 더듬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지역 광대를 연구한 그의 논문이 ‘왕의 남자’로 발전했다. 송화섭 원광대 교수는 ‘무속’의 복권을 꿈꾼다. 그의 관심은 한국의 전통 의례. 이게 지방자치제를 맞아 꽃피웠다.
송 교수는 “무속도 우리의 전통풍속인데 미신이니 뭐니 하면서 너무 쉽게 버렸다.”면서 “종교적인 측면이 아니라 문화로서 접근한다면 풍부한 이야깃거리들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콘텐츠업체 여금의 유동환 대표는 아예 동양철학자의 길을 접고 콘텐츠생산쪽으로 나선 사례다. 지금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는 고조선시대 때부터 최근까지 각종 정변이나 민란 등을 DB화하는 것이다. 여기서도 포인트는 지도자들의 삶이 아니다.“정변이나 민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시대적인 모순 아래서 고민한 보통 사람들”이 중요하다.
이런 경향에 대해 지나친 상업화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그럼에도 “역사·민속·신화 등에서 콘텐츠를 발굴해 문학의 스토리텔링 구조를 씌우고, 철학에서는 인간의 논리·체험구조나 심리적인 메커니즘을 배우는” 과정은 이미 대세에 접어들었다.‘상업적’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세상은 과거에서 점잖은 교훈이 아니라 재미있는 이야기를 원한다는 뜻을 품고 있어서다.
“인문학, 달리 말해 휴매니티스(Humanities)는 사람에 대한 얘기라는 뜻입니다. 지금 한국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 그 모든 게 인문학의 소중한 연구대상입니다.‘지구’라는 물질 자체가 물리학자에게 연구대상인 것과 마찬가지죠.” 철학자 김용석 영산대 교수는 조금 답답하다는 듯 말을 이어나갔다.“인문학이, 철학이 무엇이냐는 질문은 많지만 그래서 무엇을 해야 하느냐에는 질문도 대답도 없습니다.”
그 시대 사람의 삶과 욕망이 담긴 대중문화야말로 인문학의 훌륭한 텍스트다. 세속적인 대중문화를 비웃으며 고고한 척 할 게 아니라, 무엇 때문에 대중들이 즐거워하는지, 또 대중들의 삶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분석하는 게 인문학이라는 얘기다. 그래서 인문학은, 철학은 지금보다 좀 더 수다스러워져야 한다.“사람에 대해 얘기하는 게 인문학이라면, 사람이 존재하는 한 인문학 자체는 없어질 수가 없습니다. 십수년 전부터 나온 인문학의 위기는 사실 이걸 깨닫지 못하는 인문 ‘학자’의 위기입니다.”
이런 주장은 그가 펴낸 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보통 사람의 일상에서 철학을 뽑아낸 ‘일상의 발견’, 음식·학교·친구·회사 같은 두음절 단어를 파고든 ‘두 글자의 철학’, 인기 애니메이션을 철학적으로 분석한 ‘미녀와 야수 그리고 인간’ 등이 대표적이다.“이런 상황이라면 인문학자들의 연구과제는 길가의 돌멩이들처럼 지천으로 널려 있는 겁니다.”
구체적으로 철학이 어떻게 대중문화에 기여할 수 있을까. 그는 ‘피드백 작용’을 꼽았다.“과학이란 대상에서 규칙을 뽑아내는 과정입니다. 물리학이 물질에서 규칙성을 찾듯, 인문학·철학도 대중문화에서 인문학·철학적인 요소를 뽑아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피드백을 주고받는 과정 자체가 문화를 두텁게 해 창조를 낳는 토대가 됩니다.”
철학이 좀 더 직접적인 도움이 될 수 있다.“플라톤의 ‘대화’에서 소크라테스는 설명할 때 듣는 사람의 반응을 고려해서 여러가지 경우의 수를 듭니다. 이것 자체가 하나의 스토리입니다. 서양에서 게임이나 애니를 만들 때 철학자의 얘기를 듣는 이유입니다.”
그렇기에 김 교수는 이제 인문학자의 임무는 ‘아름다운 글쓰기’에 있다고 강조했다.“인터넷 때문에 글쓰기는 이제 끝났다고 했지요. 그런데 외려 더 늘었습니다. 이제는 글 자체의 멋, 우아한 멋까지 살려내야 인문학자입니다. 앞으로의 철학은, 인문학은 궁극적으로 ‘문예’이거든요.”
고전 번역은 쉽지 않다. 전혀 다른 세계관 아래 이미 죽어버린 언어로 쓰여져 있기 때문에 ‘그럭저럭’이라도 번역하려면 최소 10년 공부는 쌓여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얘기다.‘고전번역원’과 ‘고전번역대학원’을 세워 국가가 고전번역가를 키우자는 주장도 여기서 나왔다.
고전번역하면 역시 민족문화추진회(민추)다.1965년 설립 이래 40여년 동안 정부보조금으로 ‘연명’해오면서 번역사업을 거의 도맡다시피했다. 번역좀 한다는 사람 가운데 80% 이상이 민추의 국역연수원 출신이라는 통계가 있을 정도다. 지금 민추에다 주는 돈에 조금만 더 얹으면, 비용도 그리 큰 부담이 아니다. 그러나 한국학중앙연구원(한중연)과의 업무분장이 걸림돌이다. 한중연 고위 관계자는 “한중연이 연구중심 기관이긴 하지만, 연구·번역사업을 합쳐놓아야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번역원·번역대학원 설립을 처음 제기했던 신승운 성균관대 교수는 이런 주장이 못마땅하다. 그는 “고전번역은 누구나 쉽게 고전을 읽을 수 있도록 한다는 ‘자료의 민주화’에 그 참 뜻이 있다.”고 강조했다. 연구자들이 연구하면서 번역서를 내는 것과 숙련된 번역자가 이해하기 쉽게 풀어내는 것은 다른 작업이라는 지적이다.
모두가 공감하는 사업이 ‘밥그릇 싸움’하는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교육부는 “이제까지 번역 실적을 보면 민추의 말이 옳지만, 정부출연연구기관의 효율성 등을 감안하면 한중연의 주장도 틀렸다고 보긴 어렵다.”며 고민에 빠졌다. 여기다 교육부총리 인사 문제까지 겹쳐, 일러야 내년에나 구체적인 틀이 나올 전망이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2006-08-19 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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