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람] 국내 최초 여성이발사 이덕훈씨

[이사람] 국내 최초 여성이발사 이덕훈씨

입력 2004-06-30 00:00
수정 2004-06-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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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이라는 나이는 더 고희(古稀·예로부터 드물다)가 아니다.하지만 그 나이에 이르렀을 때 이전과 다름없이,아니 오히려 더 왕성하게 일하는 사람은 그리 흔치 않다.‘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이 종종 공허하게 들리는 이유가 여기 있다. 50년 동안 변함없는 모습으로 이발사의 길을 걷고 있는 이덕훈(69)씨.70세를 눈앞에 두면 손에서 일을 놓고 편안함을 찾기 마련이지만 그는 다르다.그를 보고 있으면 젊음이라는 단어가 나이들어도 빛바래지 않을 수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국내 ‘최초’의 여성 이발사라는 타이틀보다는 늘 ‘최선’을 다하는 이발사이기를 원하는 그다.

젊음의 비결은 50년 동안 멈추지 않은 가위질

50년째 가위를 손에서 놓지 않고 있는 국내 최초의 여성 이발사 이덕훈씨.오늘도 처음과 같은 마음으로 정성껏 손님의 머리와 일상을 다듬는다.
 강성남기자 snk@seoul.co.kr
50년째 가위를 손에서 놓지 않고 있는 국내 최초의 여성 이발사 이덕훈씨.오늘도 처음과 같은 마음으로 정성껏 손님의 머리와 일상을 다듬는다.
강성남기자 snk@seoul.co.kr
아침 9시 성북동 ‘새이용원’.이발소의 상징인 빙글빙글 돌아가는 간판에 전원을 넣으면서 이덕훈씨의 하루가 시작된다.정기 휴일인 화요일을 제외하고는 하루도 빠짐없이 저녁 9시30분까지 꼬박 12시간을 일한다.

“힘들지 않냐고요? 전혀 그렇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요.그래도 일을 하고 있으면 즐겁고 걱정이 없어요.제가 아들만 넷인데 그 애들을 임신했을 때도 가위를 놓은 적이 없습니다.돈 욕심이 없어 이러고 살지만 일 욕심은 많거든요.일 하는 게 체질인가 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아무리 50년 베테랑이라고는 하지만 손놀림이 예사롭지 않다.머리를 자르고 면도까지 30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속도는 빠르지만 꼼꼼한 솜씨에 어느 손님 하나 불만스런 표정으로 일어나는 법이 없다.

“머리 한번 망치면 한달 동안 속상하지요? 그걸 알기 때문에 매번 긴장하면서 일을 할 수밖에 없어요.그래도 그 덕에 이 나이껏 크게 아파본 적이 없습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70세를 바라보는 나이라는 게 믿겨지지 않을 만큼 피부가 곱다.어떤 화장품을 쓰냐고 묻자 아무것도 안 바를 때가 많고 손님들 쓰는 남자 화장품도 쓴단다.게다가 기억력도 비상하다.수십년 전의 일들을 연도는 물론 날짜까지 정확히 떠올릴 정도다.

“흔히 좋아하는 일을 하면 늙지 않는다고 하죠.저도 젊었을 때는 몰랐는데 나이 70을 바라보게 되면서 이제는 알 것 같습니다.적어도 10년은 더 일할 생각입니다.물론 건강이 허락한다면 그 이상도 하고 싶습니다.”

굴곡 많은 세월 속 ‘명랑 이발사’

이덕훈씨가 처음 가위를 잡은 것은 1953년.이발일을 하면서 11명의 식구를 먹여 살리던 아버지의 생색 아닌 생색을 참기 어려워서였다.

“저녁마다 집에 돌아오시면 7남매를 죽 앉혀놓고 ‘너희들은 누구 덕에 먹고 사냐.’는 질문을 하셨고 ‘아버지 덕에 먹고 삽니다.’라는 대답을 들으며 흐뭇해하셨습니다.”

하지만 이씨는 매번 ‘제 복에 먹고 산다.’고 대답했고 스무살을 앞두고 아버지에게 이발을 배우기 시작했다.이발소에 여자가 등장하자 모두 신기해했다.일을 배운 지 3년 되던 해 남들은 대여섯번씩 도전해서야 따는 자격증을 단번에 손에 쥐면서 그는 국내 최초의 여자 이발사가 됐다.

부러워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씨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을 ‘괴물’처럼 봤다고 당시를 회상한다.

“아버지가 하시는 일,여자라고 제가 못할 것도 없다 싶었죠.주위 시선도 그다지 신경쓰이지 않았고요.일을 해보니 적성에도 맞고 그래서 지금껏 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런 경우가 많지만 당시엔 결혼을 하면 여자들은 으레 일을 그만뒀다.하지만 그에겐 불행인지 다행인지 생계 문제가 급했다.사람 좋고 인물까지 출중했던 남편이 집에 돈 한푼 가져다 주는 법이 없었다.지금 이씨 소유의 이발소를 차리기까지 남의 이발소를 스무 곳 넘게 전전했다.

하지만 그는 지난 1월에 세상을 뜬 남편을 단 한번도 원망한 적이 없다.아니 오히려 남편에게 늘 고마운 마음이라고 말한다.

“고생은 했지만 결국 제가 뭔가 계속 할 수 있도록 한 게 남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전 생계가 아니었더라도 일을 계속했을 겁니다.여자라고 반드시 집안일에만 묶여야 된다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결코 쉽지 않은 삶을 살았지만 그의 별명은 ‘명랑 이발사’다.매일 일하는 즐거움,매번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재미에 빠져 살기 때문이다.

그는 “세상에 똑같은 머리,똑같은 얼굴을 한 손님이 단 한명도 없다.”며 “단조롭지 않아서 참 즐거운 일”이라고 웃는다.“일도 일이지만 이 나이에 남자 얼굴 만지면서 일하는 여자가 저 말고 또 있겠습니까.”라며 농담까지 덧붙인다.

“머리는 이발소에서 하는 게 진짜”

이발소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예전에는 여자들도 이발소에서 머리를 잘랐다고 하지만 지금은 남자들도 미용실을 찾는다.

이덕훈씨는 이렇게 이발소가 사양길을 걷게 된 책임은 어디까지나 이발소에 있다고 말한다.

“박정희 대통령때 유흥업 단속이 심해지자 이발소에서 그곳의 아가씨들을 고용하기 시작했죠.결국 이발소는 ‘퇴폐적’이라는 이미지를 쓰게 됐고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이씨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머리 자르는 데 있어서는 이발소가 ‘정통’이라고 자신한다.“이발소 다니다가 미용실에 가본 분들은 아실 겁니다.머리가 유난히 빨리 지저분해지지요.그건 원래 머리가 난대로 자르지 않고 생머리를 잘라내기 때문입니다.한마디로 장삿속에 머리를 함부로 자르는 거죠.이발소에서는 그런 짓 안합니다.”

적성에 맞는 일이라고 하지만 사실 이발사가 남들이 특별히 알아주는 직업은 아니다.하지만 이덕훈씨는 그 누구보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세상에 사람보다 높은 게 어디 있습니까.저는 그 사람들의 머리 위에서 일을 하니 저보다 대단하고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또 어디있습니까.”

머리 아닌 일상을 다듬는 이발사

쉬는 날이면 그는 노인정에 나가 머리를 자른다.자원봉사이긴 하지만 완전 공짜는 아니다.일이천원 정도라도 받는다.그가 돈을 받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돈을 받지 않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그렇게 마음 편한 일은 아닙니다.어르신들도 조금이라도 돈을 내셔야 미안한 마음없이 머리를 맡기실 수 있을 것 같아 돈을 받습니다.”

이발소에 앉아 손님들이 내는 돈을 보니 가지각색이다.잘못 본 게 아닌가 싶어 물으니 손님 형편에 따라 다르게 받는다고 설명한다.

“다른 건 몰라도 먹는 데는 돈 아끼지 마세요.”

머리를 자르면서 그는 손님들 챙기기에 여념없다.건강은 물론 집안 소사까지 챙긴다.자신의 이발소를 찾는 사람들을 ‘두당 얼마’ 식으로 계산하지 않기에 가능한 일이다.몇십 년째 그에게 머리를 맡기고 있는 손님들은 아이에서 어른으로 자랐고 청년에서 중년을 넘어서고 있다.

‘명랑 이발사’ 이덕훈씨.그는 오늘도 가위를 들고 손님들의 머리와 함께 일상을 다듬고 있다.

나길회기자 kkirina@seoul.co.kr˝
2004-06-30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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