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프로그램에서 말하고 싶었던 내용은 단순한 전쟁사가 아니었다. 이순신 장군이 거둔 엄청난 승리는 거북선이 있었기 때문이고, 당시 조선이 거북선을 만들 수 있었던 배경에는 뛰어난 기반의 과학기술 덕분이라는 것이다. 이순신 장군과 거북선에 얼마나 혼이 났으면 일본은 그 후 300여년 동안 감히 조선을 다시 침공하지 못했고, 이순신 장군의 전사와 함께 거북선도 홀연히 사라졌다고 언급하면서 방송은 끝을 맺었다.
임진왜란 무렵 유럽에서 일어난 과학혁명은 서구 지식사회를 바꿔 놓았고 산업혁명의 밑거름이 됐다. 내가 아는 어떤 물리학자는 한국에 노벨과학상을 받은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근현대사의 아픔을 겪지 않았을 것이라고 얘기한다. 역사에는 만약이 없다지만 임진왜란 때 거북선과 기술자의 중요성으로 미루어 보면, 과학이 역사를 바꿀 수 있다는 말이 결코 허황된 생각은 아닐 것이다. 필자는 물리학자로 희귀한 원자핵의 기본 성질과 우주 원소의 기원을 연구하고 있다. 여기에는 중이온가속기라는 거대한 실험시설이 필요하다. 가속된 입자들을 서로 충돌시켜 새로운 희귀동위원소를 발견하고 핵의 구조를 연구하는 것인데, 이 지식은 재료, 의생명과학 분야에 요긴하게 쓰일 수 있다. 이런 가속기는 미국, 일본, 독일 등 일부 선진국에만 있었다. 다행히 국내에서도 최첨단 중이온가속기를 대전 신동지구에 건설하고 있다. 가속기가 가동되면 이제껏 할 수 없었던 다양한 분야의 연구가 가능해진다. 문화예술 강국 한국이 기초과학 분야에서도 국격을 드높일 수 있게 중이온가속기가 크게 일조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강단에 서다 보면 ‘물리가 제일 어려워요’라고 말하는 학생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모든 학문은 추구하는 목표와 방법이 다를 뿐 어느 학문이 더 어렵고 쉽다는 것은 지극히 주관적이다. 이를테면 음치이면서 피에 대한 공포가 있는 필자에게 노래를 시키거나 의사를 하라는 것은 고역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이 잘하는 것과 그 진가를 인정하는 것은 별개이므로 많은 사람들은 예술과 의학의 중요성을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과학적인 사고에 익숙하지 않은 일반인들은 과학이 멀고 어렵게 느껴질 수 있지만, 어느 때보다 과학과 기술력이 중요한 시대에 살고 있음은 인정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