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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신춘문예 희곡 당선작] 길

[2020 신춘문예 희곡 당선작] 길

입력 2020-01-01 16:28
업데이트 2020-01-02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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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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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

미노 : 15세
이르 : 15세


장소

멕시코 남동부 치아파스에서부터 시작된 철길 위의 화물 기차. 캘리포니아주 근방의 국경을 향해 달리고 있다.

무대

정중앙에 화물 기차의 트레일러가 놓여 있다. 트레일러의 양 측면에는 상부로 오르내릴 수 있는 사다리가 부착돼 있으며, 상부에는 화물을 싣기 위해 이용하는 핸들과 레일이 튀어나와 있다. 기차는 관객석을 마주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가정한다.

처음

넓고 메마른 땅 위 철길을 달리는 화물 기차. 미노와 이르, 트레일러 상부 핸들에 허리를 묶은 채 기차가 나아가는 방향을 향해 앉아 있다. 불그스름한 노란색 조명이 두 아이의 머리 위로 비춰진다. 노을이 지고 있다. 철길 위 기차 소리만이 옅게 울린다. 주변을 둘러보던 미노, 대뜸 질문을 던진다.

미노 어디쯤일까?

이르, 대답하지 않고 정면만 응시한다. 지친 모습이다. 정적, 그리고 기차 소리.

미노 응? 여기는 어딜까? (사이) 너도 몰라?

이르…그게 중요해?

미노 중요하지. 그걸 알아야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있잖아.

이르, 대꾸하지 않고 허리에 맨 밧줄을 만지작거린다.

미노 이르, 나 지도 좀.

이르 네가 꺼내.

미노 꺼내 줘.

미노, 이르를 간절하게 바라본다. 이르, 마지못해 트레일러 측면 사다리 쪽에 매어 둔 가방으로 손을 뻗는다. 꼬깃한 종이 하나를 꺼내 미노에게 건넨다. 미노, 받지 않는다.

미노 얼마나 남았어?

이르, 미노를 흘겨보며 느리게 종이를 펼친다.

이르 터널 세 개, 아니, 두 개.

미노곧 있으면 이 길도 끝이네.

이르 아쉽냐?

미노 조금. 넌 어때?

이르, 다시 입을 다물고 철길로 고개를 돌린다.

미노 아쉽지 않아? (사이) 아니면 설레나?

이르 (기가 차다는 듯이) 대체 설렐 게 뭐가 있는데?

미노 앞으로 펼쳐질 일들 말이야. 너도 여기까지 와 본 건 처음이잖아.

이르 자꾸 종알대지 말고 조용히 해. 너 그러다가-

미노 (이르가 주의를 주는 모습을 따라하며) 떨어져, 중심 잃어, 터널한테 잡아먹혀! (미어캣처럼 허리를 곧게 피고 목을 늘여 먼 곳을 바라본다.) 터널 나오려면 한참 멀었겠다.

순간적으로 크게 덜컹거리는 트레일러. 이르, 급하게 밧줄을 묶은 핸들을 그러쥔다. 미노, 아랑곳하지 않는다.

미노 이르, 터널한테 잡아먹힌 사람 본 적 있어?

이르 (밧줄의 매듭을 확인하며 건성으로) 응.

미노 어떻게 생겼어?

이르 납작해.

미노 또띠야처럼?

이르, 불편한 기억이 떠오르는 듯 입을 다문다. 미노는 무릎을 끌어안은 채 말을 잇는다.

미노 우리 할머니 또띠야 진짜 맛있는데. 할머니는 맨날 일하러 다녔거든. 화요일이면 집에 오는 길에 꼭 옥수수 가루를 한 봉지씩 사 왔어. 만드는 방법도 다 기억해. 옥수수 가루 두 컵에 소금 한 꼬집, 한번에 엉기지 않게 물을 조금씩 넣고-

이르 우리 놀러 가는 거 아니거든.

미노 알지. 우린 순례자들이잖아.

이르 …순례자?

미노 그래. 야수의 등허리에 올라타서 국경을 넘나드는 순례자. 배고픔과 목마름을 견뎌야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근사하지 않아?

이르 (심드렁하게) 그래. 참 근사하다.

미노 미국에도 또띠야가 있을까? 맛있는 게 엄청 많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사이) 없어도 괜찮아. 만드는 방법 기억하니까. 옥수수 가루 두 컵에 소금 한 꼬집, 한번에-

이르 (말을 가로채서 빠르게 읊는다.) 엉기지 않게 물 조금씩 넣어서 납작하게 눌러 굽는다고. 알았어.

미노 외웠네? 다행이다.

이르 그게 왜 다행이야?

미노 네가 꼭 먹어 봤으면 좋겠거든. 우리 할머니 또띠야는 그냥 시장에서 파는 거랑 달라.

이르 (건성으로) 그래.

미노 진짜야!

이르 알았다고.

둘이 투닥거리는 사이 날이 저물기 시작한다. 미노, 푸르게 물드는 하늘을 보며 노래를 부른다. La Llorona.

미노눈물 많은 여인아, 하늘빛 옷 입고

눈물 많은 여인아, 또다시 흐느끼네

고달픈 삶에 길을 잃어도-

미노, 노래를 멈춘다. 이르, 미노를 쳐다본다.

이르 왜 멈춰?

미노 그냥.

이르 다음 가사 몰라?

미노 알아.

이르 뭔데?

미노, 대답하지 않는다. 이르, 나머지 가사를 채워 노래한다.

이르 고달픈 삶에 길을 잃어도

사랑만은 그대로

그대로 머무리라

미노 이 노래 어디서 배웠어?

이르 그냥. 지나다니다가.

미노 나는 할머니가 알려 줬는데. (사이) 할머니 보고 싶다.

이르 나중에 할머니도 미국으로 오시라고 해.

미노 그럴까?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아니야.

이르 뭐가?

미노 우리 할머니는 올 수 있어도 안 와.

이르 왜?

미노 싫어하거든.

이르 미국을?

미노 엄마를.

이르 엄마가 돈 보내 줬다며.

미노 맞아. 덕분에 먹고살 수 있었지. 그래도 할머니는 날 두고 간 게 마음에 안 들었나 봐.

이르 엄마랑은 언제 헤어졌는데?

미노 태어난 지 반년도 안 돼서.

이르 그럼 얼굴도 모르겠네.

미노, 품속에서 너덜너덜한 사진 한 장을 꺼내 이르에게 내민다.

미노 우리 엄마래.

이르, 사진을 받아 들고 여자의 얼굴과 미노를 번갈아 관찰한다.

이르 어, 닮았네. 그… 입꼬리가 닮았어. 눈매도.

미노 안 닮았어.

이르 아니야, 여기 보면-

미노 할머니가 그랬어, 하나도 안 닮았다고.

이르 …야, 그래도 너 먹여 살리려고 그 먼 길을 간 거잖아. 곧 있으면 같이 살게 될 거고. 난 너 같은 애 처음 봤어.

미노 나 같은 애?

이르 가족 찾으러 가는 애들 중 절반은 전화번호 하나 없이 떠나. 끊긴 연락처라도 있으면 다행이지. 그런데 넌, 너희 엄마가 코요테를 고용했다며. 널 미국으로 보내 달라고.

미노 응.

이르 넌 운이 좋은 애야.

이르, 사진을 돌려주려 한다. 미노, 고개를 내젓는다. 이르, 사진을 지도에 끼워 가방에 넣는다.

미노 그러면 너는?

이르 나는 뭐?

미노 운이 나빠? 가족이 없어서?

이르 그건 아닐걸.

미노 왜?

이르 아직 안 죽었잖아.

미노, 이르의 말을 곱씹는다. 이르, 손가락으로 기차 위 쌓인 먼지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미노 죽으면 운이 나쁜 건가?

이르 (건성으로) 몰라.

미노 혼자 다니는 거 안 무서웠어?

이르 그냥 그랬어.

미노 나쁜 사람들 많이 만났어?

이르 응.

미노 그럴 땐 어떻게 했어?

이르 …맞았어.

미노 그런데도 안 무서웠어? (대답이 없다.) 대단하다. 나는 혼자 있으면 무섭던데.

이르 다 컸는데 뭐가 무섭냐?

미노 혼자 지내 본 적이 거의 없었단 말이야.

이르 곱게도 자랐네.

미노 할머니 보고 싶다.

이르 치아파스에 계셔?

미노 아니. 떠나셨어. (사이) 아주 멀리.

어색한 정적. 기차 소리.

미노 이르, 넌 미국 도착하면 어디로 갈 거야?

이르, 미노를 무시하고 그림 그리기에 열중한다. 미노, 그런 이르를 지켜본다. 기차 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한다. 미노, 달빛에 의지해 철길을 살핀다. 미간을 한껏 찌푸린 끝에 터널을 발견한다.

미노 터널이다.

이르, 급하게 허리에 묶은 밧줄을 풀고 상부에서 내려간다. 미노도 뒤이어 내려간다. 이르는 트레일러 왼쪽의 사다리를, 미노는 오른쪽의 사다리를 끌어안는다. 기차 소리가 점점 커지다 둘을 삼킬 것처럼 울린다.

이르 (큰 소리로) 미노, 꽉 잡아!

미노 (머뭇거리다 대답한다) 응!

터널. 암전.

과거

미노 아저씨!

트레일러 위로 불이 들어온다. 미노, 앞서 핸들에 매달아 두었던 작은 가방을 끌어안은 채 움직이지 않는 트레일러 상부에 앉아 있다. 관객석을 향해 브로커와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풀어놓는 중이다.

미노 아저씨, 우리 엄마랑 통화해 봤어요? 우리 엄마 목소리 어때요? 저는 못 들어 봤거든요. 집에 전화기가 없어서요. 그래도 편지로 자주 이야기했어요. 제 이름이 그대로라서 다행이래요.

트레일러 아래로는 푸르스름한 저녁 하늘이 펼쳐져 있다. 이르, 무대 상수에서 등장한다.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으려는 듯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긴다.

미노 할머니가 엄마한테 그랬나 봐요, 이름 바꿔버릴 거라고. 근데 안 바꿨어요. 우리 할머니는 한다면 하는 사람인데, 왜 안 바꿨을까요?

이르, 이윽고 누군가에게 쫓기기 시작한다. 온 힘을 다해 도망치지만 역부족이다. 결국 잡히고 만다. 바닥에 내팽개쳐진 이르, 엎드린 채 몸을 웅크린다. 여러 발들에게 걷어차인다.

미노 제 이름, 원래는 까미노로 지으려고 했대요. 길 말이에요.

한참 이르를 짓밟고 때리던 무리가 떠난다. 이르, 겨우 몸을 일으켜 걷는다. 무대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문 두드리는 시늉을 한다.

이르 (갈라지는 목소리로) 저기요, 아무도 안 계세요?

아무도 문을 열어 주지 않는다. 이르의 걸음이 느려진다.

이르 저, 물 한 잔만. 한 모금만….

이르, 끝내 주저앉고 만다. 그때 살짝 열리는 문 하나. 틈 사이로 쏟아지는 빛이 이르를 비춘다. 손 하나가 컵을 내민다.

미노 길은, 어디서든 나타나기 마련이니까.

이르, 컵을 받아 들고 허겁지겁 물을 마신다. 문이 닫힌다.

미노 엄마가 자주 하던 말이랬어요.

이르, 비운 컵을 문 앞에 내려놓는다. 자리에서 일어나 닫힌 문을 한참 바라보다가 다시 걷기 시작한다. 느리지만 보다 힘찬 걸음걸이.

미노 아저씨.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요?

이르, 무대를 거닐다 다시 기차 곁으로 돌아온다. 트레일러 위로 오를 기회를 엿보던 찰나, 미노의 말을 엿듣는다.

미노 우리가 아니라, 나만 가요?

이르 (불쑥 끼어들며) 쟤 이틀도 못 버틸걸요.

미노, 이르를 내려다본다.

이르 저런 애들 많이 봤어요. 금방 떨어져 죽어요. 아니면 터널한테 잡아먹히든가.

미노 (다시 관객석을 향해) 나 혼자 가요?

이르 (다급하게) 저 이거 탄 적 많아요. 저번엔 소노라까지도 갔어요. 거기서 조금만 더 가면 미국이에요. 저랑 가면 쟤 미국 도착할 수 있어요.

미노 (이르를 향해) 내 이름은 미노야.

이르 쟤가 미국 가야 아저씨도 돈 받는 거죠? 그렇죠?

미노 미노라니까.

이르 제가 같이 탈게요. 보름이면 가요.

미노 …같이?

이르 같이. 같이 타게 해 주세요. 물이랑 먹을 것도 조금만요.

이르, 간절하게 관객석을 바라본다. 미노,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이르의 표정이 환해진다. 금세 트레일러 상부에 오르는 이르. 미노, 이르를 신기하게 쳐다본다.

미노몇 살이야?

이르 열다섯.

미노 이름은?

이르 …이르.

미노 ‘걷다’ 할 때 그 이르?

이르, 고개를 끄덕인다. 미노의 입가에 미소가 걸린다. 암전.

다시 현재

터널에서 빠져나온 기차의 소리는 처음과 같이 옅다. 불 들어오면 두 아이, 여전히 사다리를 꼭 끌어안고 있다. 이르, 조심스럽게 트레일러 상부로 기어 올라가 반대쪽에 있던 미노에게 손을 뻗는다. 미노, 이르의 손을 잡고 올라온다. 이르, 미노의 허리부터 핸들에 묶는다. 매듭이 튼튼한지 수차례 확인하고 나서야 제대로 앉는다. 미노, 그 모습을 지켜본다. 묘한 표정을 짓고 있다.

이르 (허리를 묶으며, 조금 들뜬 목소리로) 터널 하나. 이제 하나 남았어.

미노, 말이 없다.

이르 왜 그래? 배고파?

미노 아니.

이르가방에 크래커 조금 남았을 거야. 물도. 그거 먹어.

미노 괜찮아.

이르 곧 도착하잖아. 아낄 필요 없어.

미노 배 안 고파.

이르 그럼 왜 그래? 설마 너, 진짜 아쉬워서 그래?

미노 (말 돌리며) 그 코요테 아저씨는 왜 멕시코에 사는 걸까? 미국을 잘 아는 것 같았는데.

이르 (가방 속에서 물병을 꺼내 내밀며) 미노.

미노 (받지 않는다.) 그렇지 않아? 미국이 그렇게 멋지고 살기 좋은 곳이면, 그 아저씨는 왜 계속 코요테로 사는 걸까?

이르, 미노를 흘겨보다 물을 마신다.

이르 (물병을 가방에 넣으며) 모두가 같은 꿈을 꾸지는 않아.

미노 그럼 코요테들은 무슨 꿈을 꾸지?

이르 아무 꿈도 안 꿀걸.

미노 왜?

이르 머리에 든 게 돈밖에 없으니까.

미노 너는 코요테 아저씨가 싫어?

이르 응.

미노 나는 좋았는데.

이르 그 아저씨가 잘해 줬어?

미노 아니.

이르 그런데 왜?

미노 코요테니까.

이르 브로커들이 멋있어 보이디?

미노 브로커를 코요테라고 부르는 게 멋있어 보이는 거야.

이르 그게 그거지.

미노 엄연히 달라.

다시 덜컹거리는 트레일러. 이르, 경직돼 핸들을 붙든다. 흔들림이 잦아들자 허리 매듭을 확인한다. 미노, 아무렇지 않게 말을 잇는다.

미노 진짜 코요테들은 평생 가족들이랑 무리 짓고 산대. 하루에 수십 킬로미터를 달리면서도 절대 떨어지지 않는댔어.

이르 사람보다 낫네.

미노 그치? 나도 코요테로 태어날걸 그랬나 봐. (사이) 너, 진짜 코요테 본 적 있어?

이르 아니.

미노 나도.

이르 늑대랑 비슷하게 생겼대.

미노 그건 알아.

이르 그럼 대충 짐작되잖아.

미노 늑대도 직접 보진 못했단 말이야.

이르 직접 봤으면 아마 밥이 됐을 거다.

대화가 끊긴다. 이르, 미노의 눈치를 본다.

이르 (달래려는 듯이) 넌 운이 좋은 애니까 늑대를 만난 적이 없는 거야. 걔네 엄청 사납댔어.

미노 정말?

이르 그래.

미노 (시무룩해져서) 그럼 평생 못 보겠네.

다시 정적. 기차 소리. 이르, 떠오른 것이 있는 듯 미노의 어깨를 붙잡는다.

이르 미노, 늑대를 볼 수 있는 방법이 생각났어.

미노뭔데?

이르 상상.

미노 상상?

이르늑대를 봤다고 상상하는 거야.

미노 (실망하며) 뭐야.

이르 처음엔 그렇게 시작해야 돼. 자, 말해 봐. 늑대에 대해서 아는 거 뭐 있어?

미노 음… 털이 많아.

이르 그렇지.

미노 갈색. 그리고 검정색. 회색도.

이르 배 쪽에 있는 털은 흰색이랬어.

미노 (점점 신이 나서) 꼬리가 복실복실해.

이르 귀는 삼각형이야.

미노 주둥이가 길어.

이르 눈이 날카로워.

미노 밤엔 막 등불처럼 빛나고.

이르 엄청 빨라.

미노 그리고 높은 소리로 울어.

두 아이들, 동시에 늑대 울음소리를 흉내내다 웃음이 터진다. 이르, 재빠르게 표정을 굳힌다.

이르 아직 안 끝났어. 이게 제일 중요한 부분이야. 다 상상했어?

미노 응.

이르 눈 감아 봐.

미노, 눈을 감는 척하다가 슬쩍 뜬다. 이르, 미노의 눈을 자신의 손바닥으로 덮는다.

이르 아까 말한 걸 되새겨 봐. 털이랑, 꼬리랑, 귀, 주둥이, 눈….

미노, 얼굴을 찌푸리며 머릿속으로 늑대를 만들어 낸다.

이르 어때? 그려져?

미노 …늑대다!

이르 그래. 늑대는 어디 있어?

미노 끝없이 펼쳐진 들판.

이르 거기서 뭘 하는데?

미노 달리고 있어. 바람을 거스르면서.

이르 맞아. 늑대는 달리는 중이야. 발이 땅을 디딜 때마다 온몸의 털이 춤을 추지. 갈색, 검정색, 회색…. 여러 색들이 한 데에 섞여서 오묘한 빛깔을 만들어 내고 있어. 그렇게 달리다 햇살 아래 멈춰 서면, 털 한 올 한 올이 타오르는 것처럼 번쩍여.

미노, 탄성을 터트린다.

이르 늑대는 왜 멈췄을까?

미노 어, 사냥을 하려고?

이르 그렇지. 털만큼이나 번쩍이는 매서운 눈이 사슴을 발견했거든.

미노 사슴아, 도망가!

이르 쉿. 사슴은 풀을 뜯느라 바빠. 늑대가 자기를 향해 다가오고 있다는 걸 꿈에도 모르고 있다고. 늑대는 몸을 낮춰서 살금, 살금, 살금, 다가가다가….

이르,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큰 소리로 미노를 놀랜다. 미노, 짧은 비명을 내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한다. 허리에 묶은 밧줄이 미노를 다시 트레일러 위로 앉힌다.

미노 (꿈에서 깬 듯이) 나, 늑대를 봤어.

이르 그래. 그렇게 상상하는 거야.

미노, 숨을 가쁘게 몰아쉰다.

미노 진짜로 봤어.

이르 알았어. 진짜 본 거 맞아.

미노 코요테는? 코요테도 볼 수 있을까?

이르 그럼.

미노 코요테가 될 수도 있고?

이르 뭐든 할 수 있어.

미노, 한껏 신난 모습으로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고 다시 상상 속에 빠진다. 이르, 미노를 보며 만족스럽게 미소 짓는다. 날이 밝기 시작한다. 마지막 터널이 안개 틈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이르, 터널을 발견하고 미노의 옆구리를 찌른다. 미노, 얼굴에서 손을 떼어 낸다.

이르 (손가락으로 정면을 가리키며) 터널.

두 아이들, 밧줄을 풀기 시작한다. 겹쳐 묶은 매듭이 잘 풀리지 않는다. 다급한 마음에 손이 미끄러지기도 한다. 이르,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터널을 보며 허겁지겁 매듭을 푼다. 이윽고 트레일러 측면으로 내려가 사다리에 몸을 밀착시킨다. 기차 소리가 점점 커진다.

이르 (소리친다.) 미노! 꽉 잡아야 해!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는다. 이르, 위를 올려다보자 막 매듭에서 풀려난 미노가 몸을 일으키고 있다. 중심을 잡으려는 모습이 아슬아슬하다.

이르 뭐 해! 내려가!

미노, 이르의 외침에도 꿈쩍 않고 트레일러 위에 꼿꼿하게 서서 터널만을 바라본다.

이르 너 미쳤어? 얼른 내려가라니까!

미노 (나직하게) 나, 정말 됐어.

이르 미노! 내려가!

미노 코요테가 됐어.

이르 미노!

미노, 터널을 끌어안으려는 듯 양팔을 벌린다. 이르, 눈을 질끈 감는다. 기차의 소리가 귓등을 때린다. 마지막 터널. 암전. 기차 소리가 끊긴다. 침묵 끝에 헤드라이트를 닮은 불이 트레일러 위를 비춘다. 미노가 앉아 있다. 미노, 널브러진 밧줄을 만지작거리며 노래한다. La Llorona의 멜로디.

미노 고달픈 삶에 길을 잃고도

사랑이 그대로

그대로 머물까?

눈을 가린 여인아, 뒤늦은 후회로

눈을 가린 여인아, 손을 내밀어도

죽음의 기차 위에 선 아인

잡을 수 없었다네

계절이 가도 푸른 소나무

그대로 머물 수밖에

마지막

기차 소리 점점 커졌다가, 불 들어옴과 동시에 서서히 잦아들어 옅게 깔린다. 이르, 다급하게 사다리를 타고 트레일러 위로 올라간다. 미노, 멀쩡한 모습으로 앉아 있다.

이르 너… 너 괜찮아?

미노, 살짝 웃어 보이고는 다시 정면을 바라본다. 이르, 혼란스러운 표정.

이르 너 정말로-.

미노 이르, 미국이야.

두 아이들, 얼마 남지 않은 철길을 멍하니 응시한다.

미노 나 가방 좀.

이르, 얼떨떨하게 사다리에 묶여 있던 가방을 풀어 미노에게 건넨다. 미노, 망설이다가 가방 속으로 손을 집어넣는다. 지도를 꺼내 펼치자 엄마의 사진이 모습을 드러낸다.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이르에게 내민다. 이르, 어리둥절하게 받아든다.

미노 뒤에 봐.

이르, 사진을 뒤집는다. 낯선 주소가 쓰여 있다. 기차, 서서히 멈춘다. 이르, 급하게 짐을 챙긴다.

이르내려야 돼.

미노 이르.

이르 지금 안 내리면 붙잡혀. 얼른 내려야 돼.

지도와 사진을 가방 속에 쑤셔 넣고 사다리를 타는 이르. 한 발짝씩 아래로 내딛다 끝내 뛰어내린다. 두 발이 땅에 닿는다.

이르 미노. 얼른 내려와.

미노 이르, (긴 사이) 난 못 내려.

이르의 얼굴에 서서히 깨달음이 번진다.

이르 …언제부터?

미노 그게 중요해?

이르, 대답하지 못하고 울먹이기 시작한다.

미노 있잖아,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 상상하는 거야. (트레일러 끝 모서리에 걸터앉는다.) 이르, 나에 대해서 아는 거 뭐 있어? (대답이 없자) 어서.

이르 (훌쩍이며 천천히 나열한다.) 치아파스랑, 또띠야랑… 할머니. 까미노. 열다섯 살.

미노 엄마도.

이르, 미노의 가방에서 사진을 꺼낸다. 사진과 미노를 번갈아 본다.

미노 찾아갈 수 있겠지?

이르, 사진을 품속에 넣는다.

미노 자. 이제 눈 감아 봐.

이르, 두 손에 얼굴을 묻는다.

미노 어때? 그려져?

고개를 젓는 이르.

미노 아니야. 할 수 있어. (사이) 하나씩, 하나씩. 멈추지 말고.

이르, 천천히 고개를 들고 발걸음을 옮긴다. 기차 주변을 빙 둘러 어딘가로 향하기 시작한다. 미노, 이르를 지켜본다.

미노 모르는 게 있을 땐 채워 넣으면 돼. 늑대가 되어서, 코요테가 되어서.

이르 (중얼거린다.) …미노가 되어서.

이르, 멈춰 서서 품에서 사진을 꺼낸다. 뒷면에 적힌 주소와 눈앞의 집을 번갈아 본다. 도착이다. 미노, 허공에 대고 문 두드리는 시늉을 한다. 이르, 따라 문을 두드린다. 똑, 똑, 똑. 미노, 트레일러 상부에서 일어난다.

미노 (기대에 찬 얼굴로) 누구세요?

이르, 한참의 고민 끝에,

이르 저는,

암전. 막.
2020-01-02 4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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