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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윤봉길 의거 후 일제 핍박…상하이 떠나 8년간 ‘고난의 행군’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윤봉길 의거 후 일제 핍박…상하이 떠나 8년간 ‘고난의 행군’

류지영 기자
류지영 기자
입력 2019-01-23 21:44
업데이트 2019-02-21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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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고난의 행군 : 이동 시기 (1)물 위에 떠 있는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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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10월 미국발(發) 경제공황이 전 세계로 퍼졌다. 1차 세계대전 승전국인 미국과 영국, 일본은 그간 협력하던 자세를 버리고 각자도생에 나섰다. 내수시장 규모가 작았던 일본은 경제 위기를 탈출하고자 1931년 9월 중국 만주를 공격했다. 1932년 1월에는 상하이도 침공했다. 이 지역 이권을 선점한 미국과 영국이 철군을 요구하자 일본은 1933년 2월 국제연맹을 탈퇴하며 이들과 갈라섰다. 이 시기 임정은 일본의 공세를 피해 상하이에서 항저우, 전장, 창사, 광저우, 류저우, 치장 등으로 ‘고난의 행군’을 시작했다. 마지막 정착지인 충칭에 도착하는 데 8년이 걸렸다. 역사학계에서는 이를 ‘임정의 이동시기’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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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가 하이옌으로 피신했을 당시 은둔해 있던 짜이칭별장에 마련된 전시물. 중국국민당의 요청을 받고 김구를 물심양면으로 도운 자싱의 유력인사 추푸청(오른쪽)과 그의 며느리 주자루이. 하이옌 안주영 기자 jya@seoul.co.kr
김구가 하이옌으로 피신했을 당시 은둔해 있던 짜이칭별장에 마련된 전시물. 중국국민당의 요청을 받고 김구를 물심양면으로 도운 자싱의 유력인사 추푸청(오른쪽)과 그의 며느리 주자루이.
하이옌 안주영 기자 jya@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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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11월부터 2년간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머물던 전장의 양자먼 23호 건물에 마련된 임정 사료진열관의 모습. 1932년 상하이 훙커우 의거를 단행한 윤봉길의 업적 등이 소개돼 있다. 전장 안주영 기자 jya@seoul.co.kr
1935년 11월부터 2년간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머물던 전장의 양자먼 23호 건물에 마련된 임정 사료진열관의 모습. 1932년 상하이 훙커우 의거를 단행한 윤봉길의 업적 등이 소개돼 있다.
전장 안주영 기자 jya@seoul.co.kr
●“임정 지도자 중 군대 편성 실현은 김구뿐”

일본이 열강 질서에서 이탈해 파시즘으로 치닫던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일왕 히로히토(1901~1989)의 생일 축하연이 열렸다. 일제가 점령지 한복판에서 보란 듯 승전고를 울리는 모습에 중국인들은 말할 수 없는 굴욕감을 느꼈다. 이런 상황에서 스물네 살 한국인 청년 윤봉길(1908~1932)이 폭탄을 던져 시라카와 요시노리(1869~1932) 등 일본군 수괴들을 한꺼번에 처단했다. 그의 희생으로 한국 독립운동이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각지에서 지원금이 쇄도하며 임정의 권위가 되살아났다.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모욕을 한국이 대신 갚아준 것에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이때부터 두 나라는 항일 역사 인식을 공유했다. 중국 국민당 정부도 임정을 ‘진정성 있는 파트너’로 대하기 시작했다. 국민당 지도자 장제스(1887~1975)는 임정을 경제적으로 지원하고 중국군관학교 뤄양분교에 한인특별반도 마련했다. 한국독립군(1930년대 북만주에서 활동하던 항일부대) 출신 이청천(1888~1957) 등이 교관으로 참여했다. 이곳 출신들은 1940년 9월 임정 최초 정규 부대인 한국광복군의 주축이 됐다. 장제스는 일본의 패망이 유력하던 1943년 전후처리를 논의하려고 연 카이로회담에서 미국과 영국의 반대에도 한국 독립 약속을 받아냈다. 임정 연구의 권위자인 한시준(65) 단국대 사학과 교수는 “1919년 임정이 세워진 뒤로 수많은 지도자가 있었다. 하지만 (항일투쟁의 최종 목표인) 군대 편성 계획을 실현한 이는 김구뿐이었다”며 “한반도에서 멀리 떨어진 충칭에서 광복군을 만들어 낸 일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임정은 잃은 것도 많았다. 일제가 즉각 보복에 나섰기 때문이다. 윤봉길이 훙커우 공원에서 거사를 벌인 것이 오전 11시 40분쯤이었는데, 일본 경찰은 오후 1시 프랑스 조계로 들이닥쳤다. 대대적인 체포 작전을 벌여 안창호(1878~1938)를 비롯한 임정 관계자 12명을 체포했다. 그간 임정은 ‘폭력을 쓰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프랑스 조계 당국의 보호를 받았다. 하지만 윤봉길 의거에 충격을 받은 프랑스는 더이상 임정을 지켜 주지 않았다.

이때부터 임정은 상하이를 떠나 생존을 위한 장정에 나섰다. 일본 경찰과 군대, 밀정을 피해 중국 각지를 떠돌았다. 우선 급한 대로 찾아간 곳이 상하이에서 멀지 않은 항저우였다. 1932년 5월 임정 국무위원 대다수가 상하이에서 빠져나와 이곳으로 모였다. 반면 김구와 일부 위원들은 항저우 인근 자싱으로 몸을 숨겼다. 서로 흩어져 있는 것이 임정 존속에 유리하다고 판단해서였다. 중국 국민당 첩보기구 소속 천리푸(1899~2001)가 김구의 피난처를 주선했다. 그는 저장성장을 지낸 자싱의 유명인사 추푸청(1873~1948)에게 “김구를 누구보다 잘 챙기라”고 부탁했다. 이때부터 김구는 추푸청의 비서 겸 수양아들 천둥성의 별채(메이완제 76호) 등에서 숨어 지냈다.

●가장 두려운 것은 돈에 눈이 먼 ‘한국인 밀정’

항저우는 ‘물의 도시’라는 별명답게 호수와 수로가 산재해 있다. 임정 요인들은 일제의 감시를 피하려고 배를 띄우고 호수 위에서 회의를 열었다. 말 그대로 ‘물 위에 떠다니던 정부’였다. 항일무장단체 의열단 리더 김원봉(1898~1958)이 배를 타고 김구를 만나러 가는 장면이 나오는 영화 ‘암살’(2015)은 바로 이 시기 항저우 임정을 배경으로 했다.

하지만 이곳 생활도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임정이 상하이를 떠났다는 것을 눈치챈 일제가 추격에 나섰다. 특히 김구에게는 일본 외무성과 조선총독부, 중국 상하이주둔군 사령부가 각각 20만 대양(大洋·중국 화폐단위)을 걸었다. 60만 대양은 지금 가치로 150억~200억원에 달하는 거액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취재에 동행한 이원규(72) 작가는 “당시 김구 등 임정 요인들은 일본 경찰보다 한국인 밀정을 더욱 두려워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독립운동의 큰 적은 현상금에 눈이 먼 우리 자신이었다”고 씁쓸해 했다.

김구는 많은 이들에게 쫒기며 인생에서 가장 외롭고 힘든 때를 보냈다. 다음은 광복군 출신 인권변호사 태윤기(1918~2012)가 쓴 수기 ‘회상의 황하’ 가운데 일부다.

“윤봉길 의거 뒤로 일본은 대(大)상금을 건 동시에 밀정 300여명을 풀어 백범을 생포하는 데 집중했다. 김구는 이를 눈치채고 2년 가까이 행적을 감췄고 임정 요인에게도 위치를 알리지 않았다. 그의 행방을 아는 이는 안공근(1889~1940·안중근의 동생)뿐이었다. 그러면 김구는 어디에 있었을까. 그는 중국옷을 입은 촌로 복장을 하고는 ‘정크’라고 부르는 작은 배로 이 마을 저 마을 떠돌아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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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가 일본 경찰에 쫓겨 숨어 지내던 중국 항저우 인근 자싱의 메이완제 76호 건물에 조성된 임정 조력자 주아이바오의 게시물. 자싱 안주영 기자 jya@seoul.co.kr
김구가 일본 경찰에 쫓겨 숨어 지내던 중국 항저우 인근 자싱의 메이완제 76호 건물에 조성된 임정 조력자 주아이바오의 게시물. 자싱 안주영 기자 jya@seoul.co.kr
‘풍찬노숙’ 김구 지키며 생사 함께한 中 처녀 뱃사공 주아이바오

●부인 역할하며 日검문서 보호한 주아이바오

풍찬노숙하던 김구를 5년이나 돌보며 일본 경찰과 밀정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준 중국인 여성이 있다. 자싱에서 뱃사공으로 일하던 주아이바오(1913~?)다. 사실상 김구의 두 번째 부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김구는 ‘장천’, ‘왕사장’, ‘장전추’라는 가명을 쓰며 광둥인 행세를 했다. 하지만 중국어가 서투른 데다 키도 너무 커 쉽게 의심을 샀다. 실제로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가 풀려나는 등 일촉즉발의 위기를 맞기도 했다. 1933년 추푸청의 장남 추펑장은 그에게 신분 세탁을 위해 위장결혼을 제안했다. 김구는 자싱에서 추푸청의 집에 갈 때 우연히 만난 처녀 뱃사공을 떠올렸다. 세상 물정에 어두워 자신의 정체에 관심을 두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그렇게 김구와 주아이바오의 선상(船上) 생활이 시작됐다. 백범이 57세, 주아이바오가 20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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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저우 후볜춘 23호 소재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터. 1932년 11월 임정은 중국국민당 정부의 도움을 받아 이곳에 청사를 마련했다. 항저우 안주영 기자 jya@seoul.co.kr
항저우 후볜춘 23호 소재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터. 1932년 11월 임정은 중국국민당 정부의 도움을 받아 이곳에 청사를 마련했다. 항저우 안주영 기자 jya@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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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싱 메이완제 76호 건물에 마련된 김구의 피난처. 자싱의 유력인사 추푸청의 비서 겸 수양아들 천둥성의 별채였다. 언제라도 피신할 수 있도록 배 한 척이 준비돼 있었다. 자싱 안주영 기자 jya@seoul.co.kr
자싱 메이완제 76호 건물에 마련된 김구의 피난처. 자싱의 유력인사 추푸청의 비서 겸 수양아들 천둥성의 별채였다. 언제라도 피신할 수 있도록 배 한 척이 준비돼 있었다. 자싱 안주영 기자 jya@seoul.co.kr
처음에는 김구에게서 매달 일정 금액을 받고 일하는 계약 관계였던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신뢰가 쌓여 운명공동체로 바뀌었다. 주아이바오는 9년 전 아내 최준례(1889~1924)를 잃고 혼자 살던 김구를 애틋한 마음으로 보살폈다. 밤낮없이 이뤄지는 경찰 불심검문에서 그를 지켰다. 1937년 중일전쟁 때는 일제의 폭격이 극심하던 난징까지 따라가 그와 생사를 함께 했다.

이들은 정식으로 혼인하지 않았을 뿐 부부로 살았다. 둘 사이에 자녀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사실 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 시간이 갈수록 일본의 공세가 거세지던 1937년 11월. 김구는 주아이바오의 안전을 염려해 집으로 보냈다. 그것이 그와의 마지막이었다. ‘백범일지’에도 당시 안타까운 감정이 기록돼 있다.

“난징에서 떠날 때 주아이바오를 고향인 자싱으로 돌려보냈다. 지금도 이따금 후회되는 것은 그와 헤어질 때 여비를 100원밖에 주지 못한 것이다. 뒷날을 기약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해 돈을 넉넉하게 주지 못한 것이 지금도 미안할 따름이다.”

김구는 왜 그와 재혼하지 않았을까. 가족들의 반대가 극심했다고 전해진다. 서른일곱 살이라는 나이 차가 큰 걸림돌이었다. 서울신문 중국 취재에 동행한 김주용(53) 원광대 교수는 “주아이바오는 김구의 장남 김인(1917~1945)과 네 살밖에 차이가 안 났다. 차남 김신(1922~2016)은 한국 독립운동의 상징이 된 아버지가 이런 일로 구설에 올라 대사(大事)를 그르치지 않을까 걱정이 컸다”고 설명했다.

그런 부담 때문이었을까. 김구는 해방 뒤 주아이바오를 찾아가지 않았다. 그를 한국에 데려갈 때 생길 정치적 파장을 고려한 결정이 아니었나 싶다. 김구의 경쟁자인 이승만(1875~1965)이 스물다섯 살 연하였던 벽안(碧眼)의 이혼녀 프란체스카 도너(1900~1992)와 함께 귀국한 것과 대비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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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가 하이옌으로 피신했을 당시 은둔해 있던 짜이칭별장. 윤봉길 의거 뒤 김구는 일제의 수배를 피해 자싱의 메이완제 76호에 숨어 있었지만 일제의 포위망이 좁혀 오자 추푸청의 아들 추펑장의 처가 별장인 이곳으로 옮겼다. 하이옌 안주영 기자 jya@seoul.co.kr
김구가 하이옌으로 피신했을 당시 은둔해 있던 짜이칭별장. 윤봉길 의거 뒤 김구는 일제의 수배를 피해 자싱의 메이완제 76호에 숨어 있었지만 일제의 포위망이 좁혀 오자 추푸청의 아들 추펑장의 처가 별장인 이곳으로 옮겼다. 하이옌 안주영 기자 jya@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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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여당 역할을 한 한국독립당 사무소가 있었던 항저우 쉐스루 스신팡 지역. 항저우 임정 시절 한국독립당은 이곳에 본부를 두고 기관지 ‘진광’을 발행했다.  항저우 안주영 기자 jya@seoul.co.kr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여당 역할을 한 한국독립당 사무소가 있었던 항저우 쉐스루 스신팡 지역. 항저우 임정 시절 한국독립당은 이곳에 본부를 두고 기관지 ‘진광’을 발행했다.
항저우 안주영 기자 jya@seoul.co.kr
●중국 작가에 의해 소설 ‘선월’로 재탄생

중국 작가 샤녠성(71)은 김구와 주아이바오의 이야기를 소설 ‘선월’로 재탄생시켰다. 여기서 주아이바오는 1949년 김구가 살해됐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아 자살한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샤녠성은 몇 년 전 중국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그가 1970년대까지 생존했다는 것을 최근에 들었다. (김구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결혼하지 않고 평생 혼자 살았다고 한다”고 밝혔다.

이원규 작가는 “주아이바오는 백범과 함께 살며 어렴풋하게나마 그의 목에 거액이 걸려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라고 전했다. 당시 현상금을 받고자 김구를 노리던 한국인이 많았지만 이 가난하고 순박한 중국 여성은 그와의 인연을 소중히 여겨 끝까지 의리를 지켰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임정의 법통을 계승했다고 믿는다면 이 나라가 주아이바오에게도 큰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한다.

상하이·항저우·자싱·난징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2019-01-24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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