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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 때 스러진 희생자 ‘영혼결혼’으로 하나된 사연

4·19혁명 때 스러진 희생자 ‘영혼결혼’으로 하나된 사연

입력 2016-04-19 08:53
업데이트 2016-04-19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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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대 학생 김태년·서현무 1960년 영혼결혼식…중앙대서 19일 추모식

1960년 4·19 혁명 희생자들이 안식하고 있는 서울 강북구 4·19 국립묘지에는 다른 묘와 다르게 두명이 한꺼번에 안치된 묘가 하나 있다.

혁명당시 중앙대 약학과 3학년이던 김태년과 법학과 2학년이던 서현무(여)가 바로 그 묘의 주인공이다.

김태년은 4·19 때 부정선거에 반대하며 세종로 치안국 무기고 앞에서 시위 상황을 녹음하다 경찰의 발포로 쓰러져 서울대병원으로 이송된 후 숨졌다.

서현무는 내무부 앞에서 “의에 죽고 참에 살자”라고 적힌 현수막을 들고 학생들의 선두에 서서 투쟁하다 경찰에 연행돼 모진 고문을 당했다.

혁명이 성공해 풀려나긴 했으나, 고문으로 부상이 심한데도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해 시름시름 앓다가 두달여 뒤인 7월2일 숨졌다.

양가 부모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두 영혼을 달래주고 한을 풀어주기 위해 그해 11월 11일 영혼 결혼식을 올렸다.

4·19 국립묘지에 안치된 이들은 사후 부부의 연을 맺은터라 20m 가량 떨어져 각각 묻혔다.

정부는 동문 및 유족들로부터 이들의 안타까운 사연을 들은 후 1995년 이들을 김태년의 묘에 합장했다. 비석도 이들의 사진과 이름을 함께 넣어 다시 세웠다.

표지석에도 원래 김태년의 이름만 있었으나 지난해 둘의 이름이 함께 올라갔다.

이들의 사연은 국립묘지 내 4·19 혁명기념관에 김혜순 시인의 시 ‘영혼결혼식’과 함께 소개돼 있다.

4·19혁명이 일어난지 벌써 56년이 지났지만 해마다 이맘때면 이들 부부를 비롯해 당시 투쟁하다 떠나간 열사들을 그리워하는 추모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흑석동 중앙대 중앙도서관 뒤편에는 김태년·서현무 부부 등과 함께 희생된 고병래(상학과), 송규석(정외과), 지영헌(신문학과), 전무영(신문학과)을 기리기 위한 ‘의혈탑’이 서있다.

1960년 9월 중앙대 총장 및 교직원 일동이 세운 이 탑의 표지석 아래에는 아래와 같은 문구가 새겨져 있다.

“꽃은 피어 지나 뿌리가 깊고 씨를 맺어 긴 겨울 지나 새싹 틔워 꽃무리 이루니 여기 꽃다운 젊음을 조국과 민주의 제단에 바쳐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젊은 혼들이 있으니 민족의 대지에 피와 살을 묻어 통일을 잉태하나니 우리는 이를 의혈이라 부른다.”

중앙대는 19일 오전 10시 의혈탑 앞에서 대학 관계자들과 학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6명의 열사들을 기리는 추모식을 연다.

중앙대 관계자는 “중앙대에서는 서울대(7명) 다음으로 많은 6명의 학생들이 4·19혁명 때 투쟁하다 세상을 떠나셨다”며 “그 분들 덕분에 중앙대에 ‘의혈’이라는 명예로운 수식어가 붙여지는 등 그 분들의 희생은 중앙대에 매우 뜻깊어 매년 추모식으로 그분들을 기린다”고 전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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