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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10) 지명(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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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ㅣ 수정 : 2014-08-11 00:00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섹션 목록 확대 축소 인쇄

육조대로, 운종가, 개천… 일제가 말살한 정겨운 옛 지명들

●창지개명은 단군 이래 최악의 민족정기 말살 사건

서울의 지명은 다중(多重)적이다. 대부분 지명은 여러 개의 이름을 갖고 있다. 모든 지명에는 그렇게 부르게 된 명명(命名) 동기가 있는 데 이를 지명의 유래라고 한다면 서울의 지명은 2000년 동안 성쇠와 풍상을 겪으면서 여러 개의 이름을 가지게 됐다고 할 수 있다. 엄청난 생성과 소멸 과정을 거친 적자생존의 산물이다.

서울 중구 무교동 서울시청사 지하 시민청 한쪽에 마련된 군기시터를 관람객들이 둘러보고 있다. 조선시대 병기를 만들던 군기시 옆에는 아래모전다리가 있었다. 과일을 파는 모전(毛廛) 옆에 있어서 붙은 이름이며 개천 위쪽 다리를 웃모전다리라고 했고, 아래쪽 다리를 아래모전다리라고 불렀다. 무교(武橋)는 모교(毛橋)라는 다리가 이미 있어서 구분하려고 비슷한 다른 글자를 붙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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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중구 무교동 서울시청사 지하 시민청 한쪽에 마련된 군기시터를 관람객들이 둘러보고 있다. 조선시대 병기를 만들던 군기시 옆에는 아래모전다리가 있었다. 과일을 파는 모전(毛廛) 옆에 있어서 붙은 이름이며 개천 위쪽 다리를 웃모전다리라고 했고, 아래쪽 다리를 아래모전다리라고 불렀다. 무교(武橋)는 모교(毛橋)라는 다리가 이미 있어서 구분하려고 비슷한 다른 글자를 붙인 것이다.

서울의 지명은 산이나 물, 고개, 풍수, 바위, 들, 땅 모양, 인물, 식물, 역사적 사실을 나타내는 정겨운 토박이 이름이 주를 이뤘다. 훈민정음 창제(1446년) 이전까지 비록 우리 글이 없었지만 한자(漢字)를 빌려 이두(吏)로 적었기에 소리 체계는 살아 있었다. 더욱이 수도라는 지역적 특성 때문에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역사가 깊숙이 배어 있다. 예컨대 사간동, 내수동 같은 관아 지명이나 동소문동 같은 성문 지명을 비롯하여 왕십리나 답십리 같은 전설 지명, 압구정동 같은 누정 지명과 정릉동, 효창동 같은 능원 지명이 그것이다.

우리나라 지명의 역사에는 두 가지 경천동지할 사건이 있다. 신라 경덕왕(757년) 때 모든 지명을 일률적으로 한자로 바꾸면서 가해진 변형이 첫 번째다. 그러나 두 번째 사건인 일제의 창지개명(創地改名) 앞에서는 조족지혈이다. 일제는 조선 사람 이름을 일본 이름으로 바꾸고(창씨개명), 땅이름도 제멋대로 바꿨다. 단군 이래 최악의 사건이라 할만하다. 서울의 지명에는 이 모든 영욕이 담겨 있다.

옛 피맛골을 재개발하면서 나온 조선 초 육의전 등의 유구가 서울 종로구 청진동 그랑서울 빌딩 바닥 투명유리 안에 보존돼 있다. 청진동이라는 지명은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통폐합 당시 ‘등청방’과 ‘수진방’이라는 옛 지명에서 ‘청’ 자와 ‘진’ 자를 따와 만든 아무 뜻도 없는 합성 지명이다. 도준석 기자 pad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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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피맛골을 재개발하면서 나온 조선 초 육의전 등의 유구가 서울 종로구 청진동 그랑서울 빌딩 바닥 투명유리 안에 보존돼 있다. 청진동이라는 지명은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통폐합 당시 ‘등청방’과 ‘수진방’이라는 옛 지명에서 ‘청’ 자와 ‘진’ 자를 따와 만든 아무 뜻도 없는 합성 지명이다.
도준석 기자 pado@seoul.co.kr



서울 종로 그랑서울 빌딩 옆 옛 피맛골 청천지구 전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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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종로 그랑서울 빌딩 옆 옛 피맛골 청천지구 전시장.



서울 종로를 찾은 외국인 관광객이 운종가 관광 안내판을 읽고 있다. ‘운종가’라는 종로의 옛 지명은 지워지고 성문의 개폐를 알리는 종루가 있는 길을 뜻하는 종로(鐘路)와 종로(鍾路)가 혼용돼 쓰이는 등 지명의 정체성마저 흔들리고 있다. 도준석 기자 pado@seoul.co.kr

▲ 서울 종로를 찾은 외국인 관광객이 운종가 관광 안내판을 읽고 있다. ‘운종가’라는 종로의 옛 지명은 지워지고 성문의 개폐를 알리는 종루가 있는 길을 뜻하는 종로(鐘路)와 종로(鍾路)가 혼용돼 쓰이는 등 지명의 정체성마저 흔들리고 있다.
도준석 기자 pado@seoul.co.kr



서울은 조선 개국 이후 한성부(한성)가 공식 명칭이었지만 한양 또는 서울이라는 지명이 더 널리 쓰였다. 뿐만 아니라 도성, 수선(首善), 도읍, 경조(京兆), 경도(京都), 사대문 안 등 다양한 별칭으로 불렸다. 오늘의 서울을 있게 했고, 서울에서 가장 중요한 산인 삼각산과 백악산은 북한산, 북악산이라는 이명(異名)을 갖고 있다. 남산과 청계천의 본명도 목멱산과 개천이지만 잊혀진 이름이다.

남산은 목멱산이라는 옛 이름보다 오히려 정겨운 것이 사실이다. 인위적인 지명의 전이(轉移)가 아니어서 그렇다. 역사학자 안재홍은 목멱(木覓)은 남산의 우리말인 ‘마뫼’의 이두 표기라고 풀었다. 우리말 마뫼의 ‘마’는 앞이고 ‘뫼’는 산이므로 남산의 남(南)자는 ‘남녘 남’ 자가 아니라 ‘앞 남’자이며 결국 남산은 앞산이라는 것이다. 당시만 해도 남산은 주산(主山)인 백악산의 앞산이요, 왕이 사는 경복궁의 앞 산이었다. 지금은 서울이 확장되면서 강북과 강남의 가운데에 자리잡은 중앙산(中央山)이 됐지만….

그러나 청계천 개명은 사정이 다르다. 옛 이름인 개천(開川)보다 청계천이 더 청결한 느낌을 주긴 하지만 역사성이 훼손됐기 때문이다. 청계천은 백악산과 인왕산 사이의 골짜기였다. 개천의 발원지로 ‘청풍계천’(?風溪川)이 본명인데 청계천이라고 줄여 불렀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개천의 상류가 청계천인 셈이다. 1916년 6월 24일자 매일신보에 청계천이라는 지명이 처음 등장했다. ‘청계천변 시찰’이라는 기사에서 “개천, 일명 청계천…”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10년이 흐른 1927년 조선총독부가 ‘조선하천령’을 제정하면서 청계천이라고 바꿔 버렸다. 조선 500년 동안 한양도성의 명당수이자 하수구였던 개천이라는 이름은 이렇게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사람들은 숭례문, 흥인지문, 숙정문, 돈의문처럼 조선 개국의 설계자 삼봉 정도전이 명명한 사대문의 정식 명칭을 두고 남대문, 동대문, 북대문, 서대문이라고 즐겨 불렀다. 광희문, 혜화문, 창의문, 소덕문 등 사소문 또한 수구문(시구문), 동소문, 자하문(북소문), 서소문이라는 별칭을 주로 썼다. 인위적인 엄숙한 지명보다 방향이나 쓰임새 위주로 호칭하기를 즐겼다.

한강도 지금은 하나의 이름으로 통칭되지만 조선시대에는 동호, 경강, 노들강, 용산강, 서강, 조강 등 지역별로 세분해서 불렀다. 그중에서 3개의 강이 주를 이뤘다. 경강은 지금의 한남대교~노량진 구간, 용산강은 노량진~마포, 서강은 마포~양화진 구간을 각각 지칭했다. 학자에 따라서는 5강, 8강, 12강까지 세분했으니 우리 지명의 다중성은 일일이 예로 다 들 수 없을 정도다.

●역사는 지명에 의해 기록되지만 지명은 역사를 창조하기도

지명의 다중성은 어디에서 연유됐을까. 역사의 곡절 때문이다. 역사는 지명에 의해 기록되지만, 지명이 역사를 창조하기도 한다. 지명학(Toponymy)의 어원이 그리스어 토포스(Topos·장소)에서 비롯된 것처럼 지명은 땅의 기원과 의미, 변천사를 단순화해 보여주는 척도다. 지명이 곧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사자료가 남아 있지 않을수록 역사 연구에서 지명 의존도는 높다. 지명이 복잡하다면 그만큼 역사가 고단했다고 볼 수 있다.

지명이 여럿이라고 해서 반드시 역사의 고단함만을 나타내지는 않는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성명학(姓名學)에 빗대 보면 사물에는 하나의 이름만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에게는 태어나면서 주어지는 명(名)이 있다. 성년이 되면 자(字)를 가지며 사람에 따라 호(號)를 가진다. 죽은 뒤 시호(諡號)를 받는 사람도 있다. 왕은 사후 묘호(廟號)와 능호(號)를 가진다. 성명학에서 어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고 자나 호를 부르도록 한 것은 이름을 귀히 여기는 존명 사상 때문이다. 왕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것을 국휘(國諱)라고 하고, 존속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것을 피휘(避諱)라고 했다. 자와 호가 없는 일반인들도 이름이 함부로 불리는 것을 꺼렸기에 ‘안동댁’ 같은 택호(宅號)를 두어 누구나 부를 수 있도록 했다. 사람의 이름이 여럿이듯 땅의 이름인 지명도 여럿일 수 있다는 것이 우리네 사고방식이었다. 사람이나 사물에 별칭이 따로 있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겼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지명 왜곡은 차원이 다르다. 민족의 역사와 정기를 말살하고자 획책했다. 1914년 조선총독부는 전국의 군을 317개에서 220개로, 면은 4322개에서 2518개로 축소하는 어마어마한 행정개편을 단행했다. ‘전국 방방곡곡(坊坊曲曲)’을 이루던 우리의 마을 방(坊)을 폐지했다. 서울은 186개의 동(洞)-정(町)-통(通)-정목(丁目)으로 정리했다. 조선인들이 많이 살던 북촌은 동으로, 일본인이 모여 살던 남촌은 정으로 이름 붙였다.

일제강점기 최고의 번화가 본정통(충무로), 황금정(을지로), 명치정(명동)이 이때 생겼다. 뿐만 아니라 일본 황태자가 서울에 와서 머문 것을 기념한다면서 ‘황공하게도 다녀가셨다’는 의미의 어성정(御成町·남대문)이라는 지명을 붙였고, 술집과 찻집이 많던 다동을 일본식 다옥정(茶屋町·다동)이라고 개악했다. 일본군 육군대장의 이름을 따서 장곡천정(長谷川町·소공동)이라고 명명하거나, 일본 정신을 상징하는 ‘대화’를 넣어 대화정(大和町·남산)이라고 하는 등 얼토당토않은 이름을 부지기수로 붙였다.

22년간 지속된 동-정-통-정목 제도는 1936년 경기도 고양군, 시흥군, 김포군 지역이 서울(경성)로 편입되면서 모조리 정-통으로 통일됐다. 서울의 면적은 4배가 늘었고 186개의 동-정-통이 259개의 정-통이 됐다. 종로구, 중구, 용산구, 동대문구, 성동구, 서대문구, 영등포구, 마포구 등 8개 행정구가 생겼다.

원동이 원서정, 동세교리가 동교정, 아현북리가 북아현정, 홍제내리와 홍제외리가 홍제정, 한지면 신촌리가 응봉정, 수철리가 금호정, 두모리가 옥수정, 동막상리가 용강정, 동막하리가 대흥정, 여율리가 여의도정으로 각각 변경됐다. 역사와 문화가 깃든 우리 지명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의 절정이다.

무악재에서 발원해 남대문을 거쳐 원효로를 따라 한강으로 흐르는 만초천을 그들이 내세우는 ‘욱일승천기’에서 ‘해돋을 욱’(旭) 자를 따 욱천이라고 마음대로 바꿨고, 흑석동 일대에 고급 주택을 지어 분양한 일본인 업자가 붙인 주택단지 명수대를 지명화했으며, 노들섬을 중지도라고 명명했다.

조선시대 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 이름이 표기된 단 두 개의 길 이름도 퇴출당했다. 육조대로(광화문광장)와 운종가(종로)라는 양대 지명의 소멸이다. 육조가는 의정부와 육조가 자리한 관청거리였고, 운종가는 사람이 구름처럼 모이던 시장거리였었다. 일제는 유서 깊은 지명을 역사와 지도에서 지워 버렸다. 개천을 청계천으로 개명하거나, 인왕산(仁王山)의 한자를 엉뚱하게 인왕산(仁旺山)이라고 고친 것도 역사 말살의 속셈이었다.

해방 후 육조대로와 운종가를 왕조의 유물로 생각해 원상 회복시키지 않은 것은 후회막급이다. 삼각산이나 백악산이라는 정기가 깃든 아름다운 이름도 되돌리지 않았다. 태평로를 닦느라 고갯마루가 사라진 세종로 네거리 황토마루(황토현)의 이름도 청사에 남겼어야 했다. 우리의 조급함이 문제였다.

선임기자 joo@seoul.co.kr
2014-08-11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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