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책을 말한다] 폭군? 미치광이? ‘궁예 보고서’

[내 책을 말한다] 폭군? 미치광이? ‘궁예 보고서’

입력 2008-01-04 00:00
수정 2008-01-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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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기억하는 궁예는 어떤 인물일까. 보통의 독자들이라면 미륵불을 자칭하면서 전제정치를 행하다가 신하들의 정변으로 축출된 군주를 떠올릴 것이다. 좀 더 관심을 갖고 있는 독자라면 남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는 미륵관심법을 터득하였다고 내세우면서 죄 없는 신하들을 반역죄로 처단하고, 간통 혐의를 걸어 자신의 왕비를 불에 달군 쇠뭉치로 쳐 죽인 폭군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궁예는 과연 폭군, 미치광이에 지나지 않았던 것인가. 이 책은 궁예와 그가 세운 정권에 대한 종합적 연구이다. 궁예는 901년 고려를 건국하였고,904년에는 국호를 마진으로 바꾸었고,911년에는 다시 태봉으로 바꾸었는데, 마지막 국호를 따 태봉의 궁예정권이라고 제목을 붙였다.

신라 제51대 진성왕 3년(889) 중앙정부의 세금 독촉에 항거하여 전국적으로 농민들이 들고 일어났고, 봉기는 여러 해에 걸쳐 계속되었다. 이에 대응하여 성주 혹은 장군이라고 자칭하는 호족들이 성을 근거로 사병을 지휘하며 자신의 영역과 그곳에 사는 농민들을 보호하면서 각 지방의 지배자로 등장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견훤은 900년 백제를 세웠고, 이어 궁예도 건국하였다. 마치 삼국시대를 연상하게 하는 국면이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신라 말 고려 초는 후삼국시대라고도 부르는데, 이 시대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던 것은 태봉이었다. 대략 910년 무렵에는 전국의 3분의2를 궁예가 차지하였던 것이다.

궁예가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신라 말에는 말세라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었다. 세달사 승려 출신이었던 궁예는 미륵불이 이 세상에 와서 말세에 사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농민들을 구원해줄 것이라고 내세우면서 그들로부터 지지를 얻을 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뿐만 아니라 궁예는 군사력과 경제력을 갖춘 호족들과도 손을 잡았다. 평산 박씨 가문과 같이 본래 신라의 국경 수비를 담당하였던 패강진의 군사조직을 기반으로 대두하였던 패서 지역의 호족들이나 해상 무역으로 크게 부를 쌓았던 고려 태조 왕건의 집안을 포섭하였다.

궁예는 시대의 흐름을 간파하고 그에 적절하게 대응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점차 전제주의를 추구하였다. 나중에는 미륵불을 자칭하면서 국왕이자 부처로서 성속의 권력과 권위를 오로지하였다. 미륵관심법은 그가 신정적 전제주의를 좇았다. 반대세력을 숙청하는 수단이었다.

궁예는 몰락한 진골귀족 가문 출신으로 진골귀족으로서의 특권과 권위에 대한 집착이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 그였기에 권력을 잡게 되자 점차 가난한 농민들을 돌보거나 권력을 호족들과 나누는데 인색하게 되었을 것이다. 궁예는 기반으로 삼았던 농민들과 호족들이 등을 돌림으로써 실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조인성 경희대 사학과 교수
2008-01-04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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