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총과 천마도, 자작나무와 말다래

천마총과 천마도, 자작나무와 말다래

입력 2014-03-03 00:00
업데이트 2014-03-03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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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 비밀 상당 부분 해명, 40~50년생 자작나무 사용

경주 대릉원에 위치한 천마총은 박정희 대통령이 의욕적으로 추진한 경주관광개발계획 일환으로 황남대총이라는 초대형 고분 발굴에 앞서 그 경험을 쌓을 요량으로 1973년 4월6일에 발굴 첫 삽을 떴다. 이후 약 8개월 만인 같은 해 12월4일에 조사가 완료됐다. 그 결과 금관을 비롯한 출토유물만 1만1천526점에 달한 이른바 ‘대박’ 발굴을 기록했다.

봉분은 지름 약 47m에 높이 12.7m이며 도굴 흔적이 전연 없었다. 조사 결과를 토대로 하는 무덤 축조 연대는 5세기 후반 이래 6세기 초로 추정된다. 출토품 양상이나 무덤 규모로 보아 왕릉 혹은 그에 준하는 무덤이다. 따라서 이를 왕릉으로 본다면 이에 묻힌 주인공은 소지왕(재위 479~499) 또는 지증왕(재위 500~513)일 가능성이 있다.

이곳에서 신라 특유의 화려한 금관이 출현하기는 했지만, 이미 식민강점기에 발굴한 금관총이 ‘금관총’이라는 이름을 선전한 까닭에 발굴 이전에는 155호분이라는 숫자로만 일컫던 이 무덤은 금관을 제외하고는 천마도(天馬圖)라는 회화 작품이 유명하다 해서 이에서 이름을 따서 공식으로 천마총이라 일컫게 된다.

천마도는 실은 인간이 말을 타기 위해 장식하는 각종 도구인 마구(馬具) 중에서도 말다래에 그려진 그림이다. 말다래란 한자어로는 장니(障泥)라고 하는 데서 짐작하듯이 말이 달릴 때 발굽에서 진흙(泥)이 사람에게 튀어오르는 것을 방지(障)하고자 안장 아래, 다시 말해 말의 배 아래로 늘어뜨려 진흙 튀김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말다래는 이뿐만 아니라 말에 탄 사람의 안전사고를 예방하는가 하면 발걸이인 등자로부터 말을 보호하는 역할도 한다.

나아가 말다래는 장식성, 혹은 선전성이 있어 중요한 행사나 행렬 같은 데서는 장엄함을 높여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한데 대체로 4~6세기 무렵 신라인, 특히 왕을 비롯한 특권층에서는 죽은 사람을 매장할 적에 말다래를 포함하는 마구류를 껴묻거리로 함께 묻어주기도 했다.

천마총에서는 말 안장 3점이 나왔다. 안장이 3점이라는 뜻은 관련 마구류를 온전하게 갖춘다고 가정할 때 말다래는 총 6점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말다래는 말의 배 양쪽에 한 쌍을 달기 때문이다. 실제 천마총을 발굴한 조사단에서는 이곳에서 총 3세트 6점의 말다래가 출토됐다고 보고했다.

천마총 발굴보고서를 보면 나중에 국보 207호로 지정되는 천마도가 출현한 시점을 1873년 8월22일로 적고 있다. 이 날짜 발굴일지를 보면 “맑음. 백화수피제 천마문 장니 발견”이라고 적었다.

천마도를 그린 말다래는 세트여야 하니, 실제 세트로 확인됐다. 두 말다래는 각각 아래위로 포갠 상태로 껴묻거리를 묻어두는 나무 상자 안에서 발견됐다. 그래서 지금은 흔히 두 말다래를 각각 상하로 구분한다. 위에 있던 것을 상(上), 아래 있던 것을 하(下)로 구분하는 것이다.

국보로 지정되고, 각종 교과서에도 빠짐없이 실리는 천마도는 두 말다래 중에서도 아래쪽에서 발견된 것이다. 위쪽 말다래에도 천마도가 확인됐음에도 왜 유독 아래쪽 말다래 천마도만 유별나게 잦은 소개가 이뤄졌을까?

당시 발굴단인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는 “당연히 아래쪽에 눌려 있던 말다래가 보존상태가 훨씬 좋았고, 천마도 또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 두 말다래는 주된 재료가 모두 백화수피(白樺樹皮)다. 백화수피는 특정한 나무를 지칭하지는 않는다. 글자 그대로는 껍질이 흰색 계통으로 화(樺) 계통에 속하는 나무껍질을 의미한다. 한데 백화를 흔히 자작나무로 이해하곤 한다. 실제로 발굴단에서는 이 백화수피를 자작나무 껍질로 보았으며 이런 이해가 최근까지도 광범위하게 상식으로 유통됐다.

한데 90년대 이후 백화가 곧 자작나무라는 통설은 심대한 도전에 직면한다. 껍질이 흰 나무로는 자작나무가 유일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 왕벚나무나 거제수나무 같은 활엽수 껍질도 백화라 한 기록이 옛날 문헌에서는 더러 발견된다.

이에 더해 자작나무 자생지가 문제가 대두했다. 자작나무는 한반도에서는 중부 혹은 남쪽 지방에서는 자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한반도에서는 북부지방 고산지대에서 자란다. 물론 요즘은 곳곳에 자작나무가 조경수 등으로 심는 일이 많으므로 남부지방에서도 자란다는 속설이 있지만, 이는 근래에 와서 일어난 현상일 뿐이다. 실제로 중남부 지방에 인위적으로 심은 자작나무는 생장에 커다란 한계를 보인다.

물론 반론이 있을 수도 있다. 삼국시대와 지금의 식생대 혹은 기후가 달랐을 가능성이 그것이다. 하지만 백화수피=자작나무라는 통설을 흔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목재조직학자 박상진 경북대 명예교수는 “삼국시대 식생대 혹은 기후가 지금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천마총을 축조하던 무렵 신라에서는 자작나무가 자생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봐야 한다. 그래서 박 교수는 천마도를 그린 바탕인 백화수피가 진정 자작나무라면 고구려 같은 데서 수입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가설을 제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천마도 백화수피가 자작나무 껍질이라는 설이 다시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비슷한 시대 다른 무덤에서 출토된 백화수피 자료를 검토한 박 교수 또한 “정밀한 분석이 있어야겠지만, 육안으로는 자작나무일 가능성이 크다”고 동의한다.

그렇다면 자작나무 껍질은 왜 그림을 그리는 ‘종이’로 사용됐을까? 이는 자작나무가 갖는 특징에서 비롯된다. 자작나무 껍질은 벗겨내면 마치 종이와 같다. 더구나 질겨서 잘 떨어지지도 않는다. 이런 특성을 간파한 신라사람들이 자작나무 껍질을 종이처럼 사용했을 것이다.

천마총 특별전을 준비 중인 국립경주박물관이 이에 즈음해 백화수피 천마도 말다래를 둘러싼 비밀 상당수를 해소했다. 우선 말다래 제작에 사용한 백화수피는 총 3장의 자작나무 껍질이 사용된 사실을 밝혀냈다. 천마를 그린 앞면에는 자작나무 줄기에서 껍질눈과 직교하는 방향으로 벗겨낸 껍질 1장을 사용하고, 뒷면에는 반대 방향으로 잘라낸 껍질 두 장을 이어붙였던 것이다. 백화수피 말다래 두 점은 모두 앞판보다 뒤판이 두꺼운 것으로 드러났다. 나아가 정밀 조사 결과 이런 껍질에서는 나무 옹이 흔적도 찾아냈다.

자작나무 수령은 분석 결과 앞판은 40년 전후였고 뒤판은 52년임이 드러났다.

그렇다면 자작나무 껍질은 언제 채취했을까? 이런 둘러싼 비밀은 실험으로 풀었다. 실제 자작나무로 실험한 결과 수액이 오르는 3~4월에 채취한 껍질이 그렇지 않은 시기에 채취한 껍질에 비해 월등히 종이 재료로 우수성을 나타냈다. 실제로 물이 오른 시기의 껍질이 훨씬 잘 벗겨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나아가 이렇게 채취한 껍질은 자연 건조한 상태보다는 물에 한동안 담근 뒤 건조한 다음에 간단한 공정, 예컨대 다리미질을 하고서 사용해야 훨씬 상태가 좋은 것으로 조사됐다.

이런 자작나무 껍질에 그린 천마도 제작을 위해 사용한 안료는 연백(鉛白.백색)과 진사(辰砂.적색), 먹(墨.흑색), 석록(石綠.녹색)으로 드러났다.

경주박물관은 이번 천마총 특별전을 준비하면서 그 마스코트 격인 천마도를 분석함으로써 이런 성과들을 얻어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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