홉스봄, ‘폭력의 시대’서 두 가치 충돌관계 고찰
두 개의 가치가 존재한다. 세계화는 오늘날 거부할 수 없는 절대가치인 것처럼 여겨진다. 다른 대안이 없다는 이유다. 민주주의는 언제나 포기할 수 없는 가장 기본적인 가치였다. 인간적인 삶의 기초가 된다는 이유에서다.문제는 거부할 수도, 포기할 수도 없는 두 개의 가치가 만나면 충돌이 발생한다는 데 있다. 세계화가 가속화될수록 민주주의가 위협받는 장면이 곳곳에서 목격되고,‘민주주의 수호’를 외칠수록 세계화에 걸림돌이 된다는 아우성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세계화 시대에 민주주의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두 가치의 충돌은 최대의 딜레마이자 고민거리다.
이 딜레마의 깊숙한 곳으로 영국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이 파고 든다.‘시대’ 3부작(‘혁명의 시대’‘자본의 시대’‘제국의 시대’)으로 19세기를 탁월하게 해부했던 홉스봄은 어느덧 91세가 됐다. 그의 생애 마지막 책이 될지도 모를 ‘폭력의 시대’(이원기 옮김, 민음사)에서 홉스봄은 세계화와 민주주의의 이율배반적 관계를 고찰한다.
홉스봄은 다분히 비관적이다. 본질적으로 21세기는 세계화의 급류에 휩쓸려 불평등을 양산하고 있다는 게 홉스봄의 기본 시각이다. 세계화는 국민국가의 붕괴를 가속화한다. 오랜 기간 민주주의는 국민국가의 테두리 안에서 작동되는 것으로 믿어져 왔다.
이제 그 믿음은 무너지고 있다. 세계화가 국민국가의 역할을 뒤흔들면서 국민 삶을 지탱하는 최소한의 민주주의 장치들이 해체되고 있다. 세계화의 음지는 국민국가의 복지 기능을 약화시키고, 국가 구성원들의 사회·경제적 차별을 심화시킨다. 홉스봄은 지난 시기 세계화의 장애물을 제거해온 각국 정부의 경쟁적 노력이 이젠 거꾸로 개인의 불안을 자극해 세계화를 발목잡는 결과를 낳고 있다고 진단한다.
민주주의의 미래에 대한 홉스봄의 전망은 묵시론적이라고 할만하다. 세계화에 대한 대안이 없는 한 국민국가의 정체성은 거듭 약화되고, 그 결과 불안정이 증폭되는 현상이 되풀이될 것으로 본다. 그렇다고 홉스봄이 국민국가를 무조건 옹호하는 건 아니다.21세기 유일 초강대국의 지위를 잃지 않으려는 미국의 국민국가적 열망이 패권적 세계화의 형태로 표현되면서 둘은 교묘한 ‘공범’관계를 맺는다. 미국의 패권전략은 세계화로 인한 내부의 불평등을 돌파하려는 위기관리 방법이기도 하다. 국민국가와 세계화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지점들이 여기저기 산재한다.
현 시기 한국은 세계화와 민주주의간의 충돌이 가장 극적으로 가시화되고 있는 공간 가운데 하나다. 민주주의는 사회경제적 민주화로 진전되지 못하고 있고, 세계화가 파생시키는 양극화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책의 해제를 맡은 김동택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연구교수는 “홉스봄을 인용하자면 검역주권과 건강권을 지키려는 촛불집회는 무차별적인 시장의 자유와 세계화에 대항하는 민주주의 운동으로, 일국적 차원의 민주주의와 세계화가 충돌하는 지점을 잘 보여 주고 있다.”고 썼다.
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2008-07-10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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