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윤대녕·시인 이성복 ‘살가운 산문집’ 출간

소설가 윤대녕·시인 이성복 ‘살가운 산문집’ 출간

입력 2004-12-09 00:00
수정 2004-12-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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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위무가 더욱 절실해진 궁핍의 시대, 두 작가가 나란히 산문으로 위무의 발언을 했다. 이성복(52)시인의 사진에세이 ‘오름 오르다’(현대문학 펴냄)와 소설가 윤대녕(42)의 연작산문집 ‘열두 명의 연인과 그 옆사람’(이룸 펴냄). 녹록한 한담을 가장했으나, 곤고한 생을 달래 주는 화법들이 두 작가 모두 독특하고도 살갑다.

윤대녕 “사랑은 비와 같아서 하늘이 알아서 퍼부어줄 때까지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한다.”

윤대녕(왼쪽)·이성복씨
윤대녕(왼쪽)·이성복씨 윤대녕(왼쪽)·이성복씨
“사람이란 무릇 추억을 완성하기 위해 살아간다.” 들을 때마다 고개를 주억거리게 되는 신통하고도 빛바랜 그 언표를 작가 윤대녕도 문득 꺼냈다. 청춘을 장식했던 열두 번의 만남을 작가는 산문집 ‘열두 명의 연인과 그 옆 사람’ 속으로 일제히 소환했다. 여성성마저 환기시키는 작가의 섬세한 시적 글쓰기가 또 한번 힘을 발휘하는 글모음이다.

책은 모두 열두 편의 짧은 산문으로 묶였다. 제목 속의 ‘옆 사람’은 화자인 ‘나’인 셈이다. 지나간 시간 속에 ‘나’는 머물러 있고 그 곁으로 열두 명의 여자들이 서로 다른 빛깔의 열정으로 스쳐 지나간다. 그러니까 ‘나’와 기억에서 불려나온 연인이 매번 다른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는 연작인 셈이다.

한 줄의 서문도 걸치지 않고 곧바로 소개되는 첫번째 글 ‘푸른 비단에 싸인 밤’에서부터 독자들은 몽환적 감성에 잠길 만하다. 인터넷 오디오 파일 동호회에서 메일을 주고받으며 알게 된 스물여섯살의 여자와 ‘나’는 우여곡절 끝에 만나지만 끝내 사랑을 이루지 못한다. 평범한 일상에서 마주쳤던 사랑의 기억들을 감성적 문체로 써내려간 산문들에는 작가의 자전적 글쓰기 흔적이 여실하다.10년 전 다니던 치과의 간호사로 늘 허름한 밥집에서 오동나무 밥상을 마주했던 그녀(‘스물세개의 계단으로 오는 가을’), 가난했던 대학시절 곧잘 술을 사주던 동창생 그녀(‘나의 하이네켄 스토리’), 독자로 만났으나 자신의 사연을 소설로 써주길 바랐던 그녀(‘쥐와 장미’)….

줄이어 등장하는 사랑이야기 가운데 몇편은 모르긴 해도 작가가 한때 며칠밤을 신열로 보냈을 내밀한 사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과의 만남과 헤어짐에 불 같은 격정은 드러나지 않는다. 짧은 콩트 형식의 산문들을 통해 “사랑만이, 관계만이 희망이며 유효기간이 없는 삶의 동력”이라 외치는 작가는 독자들로 하여금 저마다의 사연들을 오버랩시켜 감상을 마무리짓게 이끈다. 작가의 연애관을 들여다보는 재미도 덤이다.“사랑은 비와 같아서 하늘이 알아서 퍼부어줄 때까지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한다.”(‘윤희하원’) 9700원.

이성복 “가난은 조금 나았다가는 또 도졌다가 하는 병처럼 그럭저럭 지낼 만은 하고…”

이성복 시인의 새 산문집 ‘오름 오르다’는 매우 독특한 질감이다. 소재부터 낯설어 더 흥미롭다.‘오름’은 용암이 굳어 만들어진 제주의 산(山). 고집스럽게 오름을 찍어온 작가 고남수씨의 흑백 오름사진들을 통해 시인은 시적 영감을 이끌어냈다. 흑백사진 속에 둥근 선의 추상으로 들어앉은 오름들. 그들에게서 생의 이치를 은유로 뽑아내는 시인의 감식안은 서늘하도록 날카롭다.

예컨대 솟아오른 잿빛 봉분 앞에서 시인은 ‘시간의 부활’을 읽어낸다.“언제나 현재의 뒤안에서, 딱딱한 사물의 주검을 덮고 있다가, 재생의 빛깔인 잿빛을 띠고, 어떤 한숨보다 나즉히 잊혀진 사물의 목소리로 되살아나는 과거가 되기 위해, 현재는 다시 소멸하는 것일까.”(‘은유의 잿빛 봉분’)빈곤으로 점철되는 삶을 “다, 그런 것”이라며 토닥이기도 한다.“가난은 아주 견딜 수 없는 것은 아니어서, 조금 나았다가는 또 도졌다가 하는 병처럼 그럭저럭 지낼 만은 하고, 그러는 사이 밥도 먹고 친구도 만나고, 때로는 말도 안 되는 꿈, 깨고 나면 씁쓸하기만 한 꿈을 꾸는 그런 날들을 생각나게 한다.”(‘한심하고 어설픈 가난의 곡선’)범상한 눈으로는 그저 선일 뿐일 오름에서 시인은 번번이 미학의 이미지를 걸러낸다. 그것은 “봉긋한 배와 처진 가슴을 드러내놓고 잠자는 중년 여인”이 됐다가 때로는 “부드럽고 느린 지느러미를 해묵은 슬픔처럼 늘어뜨리고 있는 어떤 것”이 되기도 한다.

생명의 본질을 고요히 묵상케 하는 대목들은 글쓴이가 시인이었음을 어쩔 수 없이 환기시킨다. 오름을 흰 선으로 가르는 외줄기 길의 사진에서 시인은 “차안(此岸)과 피안(彼岸)”을 보고, 인간이성의 한계를 넌지시 짚는다.“애초에 인간이 구획과 분리의 수단으로 강을 이용하지 않았더라면 피안도 차안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므로.

1977년 ‘문학과지성’으로 등단한 시인은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호랑가시나무의 기억’, 산문집 ‘나는 왜 비에 젖은 석류 꽃잎에 대해 아무 말도 못 했는가’ 등을 펴냈다.9500원.

황수정기자 sjh@seoul.co.kr
2004-12-09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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