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초 비야(멕시코), 히토프(불가리아), 라진(러시아), 로브 로이(스코틀랜드)…. 중세 영국의 전설적인 영웅, 로빈 후드로 대표되는 의적(義賊)의 계보를 잇는 이름들이다.
불가리아의 민중봉기 지도자 파나요트 히토… 불가리아의 민중봉기 지도자 파나요트 히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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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리아의 민중봉기 지도자 파나요트 히토…
불가리아의 민중봉기 지도자 파나요트 히토프.
영국 역사학자인 에릭 홉스봄이 쓴 ‘밴디트’는 의적의 역사라는 독특한 분야에 천착한 책이다.1959년 ‘원초적 반란자들’이란 제목으로 단초를 제공했던 저자는 10년 뒤 ‘밴디트’의 초판을 완성했고,1971년과 81년 잇달아 개정 증보판을 내놨다. 이번에 번역된 판본은 99년에 출간된 네번째 개정판이다.
저자는 산적을 권력이나 법의 테두리밖에 선 사람들이며, 동시에 잠재적인 권력의 행사자들이라고 정의한다.‘산적(bandit)’의 어원이 된 이탈리아어 ‘bandito’는 ‘법 바깥에 위치한 남자’란 뜻.‘혁명의 시대’‘자본의 시대’‘제국의 시대’‘극단의 시대’등 20세기 고전으로 평가받는 시대 4부작을 집필한 저자는 ‘현실 참여로서의 역사, 실천으로서의 역사’라는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로서의 신념을 이 책에도 적용시킨다.
●시대와 민중의 심성이 신화를 요구
그가 관심을 갖는 것은 의적 개개인의 영웅담이 아니라 의적 신화가 만들어지게 된 원인과 과정이며, 신화를 필요로 했던 시대적 배경과 민중의 심성이다. 때문에 의적의 활동과 역사는 권력의 역사라는 맥락에서 이해된다. 저자가 보기에 개인으로서 그들은 혁명가나 사회적 반란자라기보다는 굴복하기를 거부한 농민들이다. 로빈 후드로 대표되는 전통적인 의적은 전통과 옛 방식을 지키고자 했던 사람들이다.
1장 ‘산적, 국가, 권력’에서 산적의 역사와 권력의 역사간의 연관성을 시사하는 것으로 출발한 책은 의적의 정체성, 의적의 이미지와 신화 등을 파헤친다. 그리고 의적의 여러 형태 중에서도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자유농민 출신의 무장 조직’들을 각국의 실례를 통해 고찰하고, 기존 사회의 틀안에서 산적의 존속을 가능케 하는 경제적·정치적 요소에도 눈을 돌린다.
●20세기 신흥혁명가 그룹에도 존재
45년동안 감옥에서 살았던 주세페 무솔리노… 45년동안 감옥에서 살았던 주세페 무솔리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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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년동안 감옥에서 살았던 주세페 무솔리노…
45년동안 감옥에서 살았던 주세페 무솔리노.
책은 의적의 역사를 단순히 과거의 일로만 치부하지 않는다. 콜롬비아혁명군, 이탈리아 붉은 여단, 아일랜드공화국군(IRA), 사파티스타 등으로 대변되는 20세기 신흥 혁명가 그룹에도 의적의 그림자는 드리워져 있다. 지적, 정치적 수준이나 사회적 맥락은 다르지만 둘다 ‘신화’획득을 최대 목표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는 유사하다.
한쪽은 자기 보상으로서 신화를 필요로 하며, 다른 한쪽은 선전과 홍보의 수단으로서 신화를 요구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압제를 전복시킬 희망을 품을 수 없을 때 정의가 가능하다는 것을, 그리고 가난하다고 해서 유순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람들. 산적 신화는 그래서 아직도 우리의 심장을 뜨겁게 하는 현재 진행형 신화이다.1만 5000원.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2004-11-13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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