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사회에서 집은 가장 기본적이고 본능적 필요성이 반영되는 생존의 필요조건이자 잉여의 투영이다.또 한 시대,개개인이나 그 집단의 모습을 고스란히 그려내는 자화상이자 역사의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집을 포함한 모든 구조물은 필요를 반영하며,필요는 생활과 관습의 축적에서 나온다.관습은 자연스럽게 그 사회와 색조를 같이 하며,그 색조를 낳는 것은 사회를 지탱하는 이념이다.그래서 집은 한 시대,한 사회의 실록과 비견되는 역사성을 담은 유형의 자산이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노버트 쉐나우어의 신간 ‘집-6000년 인류 주거의 역사’는 선사(先史)와 유사(遺史)의 시대를 살았던 인류의 자취를 건축이라는 스펙트럼으로 다시 조영하는 역저로 손색이 없다.저자는 선사시대에서 20세기에 이르기까지 기능과 형태의 진화를 거듭해온 집의 역사를 40여년의 연구 끝에 집대성했다.
그는 저서에서 “집의 역사를 탐구하는 작업은 인류 문명의 진보와 퇴락을 실체적으로 더듬는 일이며,나아가 문명을 가능하게 한 개개인의 내밀한 필요와 욕망이 주거공간에서 어떻게 반영됐는지를 살필 수 있는 유의미한 모색”이라고 규정한다.집이란 인간의 이성과 자연환경은 물론 정치와 사회경제적 조건까지를 퍼담는 포괄적이고 구체적인 문화의 실체이기 때문이다.
책은 원주민의 움막과 유랑민의 천막집,고대도시의 주거는 물론 근대의 양식건축까지 모든 주거양식을 망라해 집의 변천사를 풀어헤치고 있다.또 집의 정체성에 접근하기 위해 북극의 이누이트족,호주의 아룬타족,남미의 인디언은 물론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중국 등 세계 각지의 특색있는 주거유형을 모두 섭렵해 보인다.이번에 출간된 번역판에서는 원저에 없는 ‘한국의 주거’도 포함돼 있다.
그는 책에서 6000년 인류 역사를 지탱하는 실체적 증거로 집을 들고 그 원형과 발달과정을 꼼꼼하게 추적한다.동양의 특징적 주거 유형인 ‘내향형 중정주택’과 서양의 문화를 담은 ‘도시주거’를 살펴 동서양문화의 ‘같고 다름’을 집의 양식이라는 독도법으로 조영하는가 하면 기존 문명사를 부정하는 놀라운 주장도 편다.우리가 주거의 시원으로 알고 있는 동굴이 사실은 수렵채집사회에서의 임시거처였을 뿐 최초의 자생적 원시주거는 어머니의 자궁을 닮은 움막이라는 것.
이런 탐구의 경로를 거쳐 그가 제시한 미래는 결코 서양식이 아니다.서양식이라는 게 너무 크고,단단하며,소통의 통로가 없어서다.
그가 “우리는 조금 모자라게 사는 법을 배워야 하며 자연은 정복해야 할 적이 아니라 조화를 이루며 함께 살아갈 동지라는 인식이 필요하다.”고 한 말은 바로 지금의 우리에게 주는 고언이 아닐까.3만 5000원.
심재억기자 jeshim@seoul.co.kr
이런 점에서 노버트 쉐나우어의 신간 ‘집-6000년 인류 주거의 역사’는 선사(先史)와 유사(遺史)의 시대를 살았던 인류의 자취를 건축이라는 스펙트럼으로 다시 조영하는 역저로 손색이 없다.저자는 선사시대에서 20세기에 이르기까지 기능과 형태의 진화를 거듭해온 집의 역사를 40여년의 연구 끝에 집대성했다.
그는 저서에서 “집의 역사를 탐구하는 작업은 인류 문명의 진보와 퇴락을 실체적으로 더듬는 일이며,나아가 문명을 가능하게 한 개개인의 내밀한 필요와 욕망이 주거공간에서 어떻게 반영됐는지를 살필 수 있는 유의미한 모색”이라고 규정한다.집이란 인간의 이성과 자연환경은 물론 정치와 사회경제적 조건까지를 퍼담는 포괄적이고 구체적인 문화의 실체이기 때문이다.
책은 원주민의 움막과 유랑민의 천막집,고대도시의 주거는 물론 근대의 양식건축까지 모든 주거양식을 망라해 집의 변천사를 풀어헤치고 있다.또 집의 정체성에 접근하기 위해 북극의 이누이트족,호주의 아룬타족,남미의 인디언은 물론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중국 등 세계 각지의 특색있는 주거유형을 모두 섭렵해 보인다.이번에 출간된 번역판에서는 원저에 없는 ‘한국의 주거’도 포함돼 있다.
그는 책에서 6000년 인류 역사를 지탱하는 실체적 증거로 집을 들고 그 원형과 발달과정을 꼼꼼하게 추적한다.동양의 특징적 주거 유형인 ‘내향형 중정주택’과 서양의 문화를 담은 ‘도시주거’를 살펴 동서양문화의 ‘같고 다름’을 집의 양식이라는 독도법으로 조영하는가 하면 기존 문명사를 부정하는 놀라운 주장도 편다.우리가 주거의 시원으로 알고 있는 동굴이 사실은 수렵채집사회에서의 임시거처였을 뿐 최초의 자생적 원시주거는 어머니의 자궁을 닮은 움막이라는 것.
이런 탐구의 경로를 거쳐 그가 제시한 미래는 결코 서양식이 아니다.서양식이라는 게 너무 크고,단단하며,소통의 통로가 없어서다.
그가 “우리는 조금 모자라게 사는 법을 배워야 하며 자연은 정복해야 할 적이 아니라 조화를 이루며 함께 살아갈 동지라는 인식이 필요하다.”고 한 말은 바로 지금의 우리에게 주는 고언이 아닐까.3만 5000원.
심재억기자 jeshim@seoul.co.kr
2004-08-21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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