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 현감 변응정의 횡당촌전투는 8월 27일 벌어졌다. 변응정은 왜란 초기 크게 불리한 상황에서도 ‘왜적이 군대를 30만이나 내보냈다면 내부는 반드시 비었을 것이니 우리가 수군 4만~5만으로 곧장 근거지를 쳐부수면 저절로 무너질 것’이라고 상소한 기개 있는 장수다. 변응정은 당초 조헌·영규와 금산성을 함께 치기로 했지만 싸움이 모두 끝난 다음에야 닿을 수 있었다. 변응정 부대는 금산성 서남쪽 조종산성에서 왜군과 맞부딪쳤지만 중과부적이었다. 칠백의총에는 변응정의 위패도 조헌·영규와 나란히 모셔졌다.
조선군은 이렇듯 금산의 왜군과 싸워 한 차례도 승리를 거두지 못했지만, 우리 쪽에서조차 무모하다고 비판했던 전투가 이어지면서 견디지 못한 왜군은 9월 16일 금산성을 버리고 철수했다. 이렇게 보면 일련의 금산전투는 졌지만 결과적으로 이긴 전투가 아닐 수 없다. 중심에 고경명과 조헌·영규·권종·변응정은 물론 휘하의 이름 없는 의병·의승병·관군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제2차 금산전투가 벌어진 8월 18일을 양력으로 환산한 9월 23일 칠백의총에서 해마다 정부가 주도하는 순의제향(殉義祭享)이 열린다. 엊그제 행사에서 불교계는 ‘조헌의 700명 의병뿐 아니라 영규의 800명 의승병도 기려야 한다’는 목소리를 다시 냈다. ‘칠백의총’이 아니라 ‘금산의총’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천오백의총’을 주장하기도 한다. 이름에도 역사성이 있다는 문화재청 설명은 일리가 있다. 같은 이치라면 일제강점기 사라졌다는 의승병 사당 승장사(僧將祠)를 복원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마다할 이유는 없을 듯하다.
2023-09-26 2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