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로의 아침] ‘오펜하이머’와 절멸/임병선 국제부 선임기자

[세종로의 아침] ‘오펜하이머’와 절멸/임병선 국제부 선임기자

임병선 기자
입력 2023-08-25 00:27
수정 2023-08-25 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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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선 국제부 선임기자
임병선 국제부 선임기자
국제부 기자로서 ‘오펜하이머’는 보고 또 봐야 할 영화다. 736쪽의 원작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를 3시간으로 옮겨 손에 땀을 쥐며 보게 만든 크리스토퍼 놀런의 연출력이 대단했다. 복잡하고 모순적인 줄리어스 오펜하이머의 내면을 그리면서도 당대를 주름잡던 물리학자들, 정치인들, 군인들과의 관계를 촘촘하게 엮었다. 1940~50년대 사람들의 불안과 공포를 이렇게 손에 잡힐 듯 전해준 영화가 또 있나 싶다.

배경을 정확히 알고 관람했어야 할 대목들이 적지 않았다. 그가 산스크리트어에 능통해 힌두교 경전에 나오는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도다’를 되뇌며 첫 원자폭탄 실험을 산스크리트어 ‘트리니티’라 부른 것도 알고 있었지만 그의 내면을 정확히 읽어내기 힘들었다.

독일 과학자들이 핵분열을 통해 엄청난 에너지가 만들어진다는 원자폭탄의 원리를 파악하고 우라늄 농축 기술을 실험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던 그는 나치보다 먼저 원자폭탄을 만들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모든 부담을 떠안는다.

그의 엄청난 추진력과 집중력에 힘입어 미국은 개발에 착수한 지 3년 만에 원자폭탄을 만들고 일본의 두 곳에 떨어뜨려 태평양전쟁을 끝냈다. 맨해튼 프로젝트에 매진해야 한다며 수소폭탄 개발을 한사코 주장하는 에드워드 텔러를 쫓아내면서도 일주일에 한 번 회의에 참석해 진전 사항을 보고하라고 했다.

기자에게는 원폭 투하 이후 소련에 제조 기술을 빼돌렸다는 혐의를 받고 힘겨워하면서도 달관한 듯, 왠지 모르게 즐기는 듯한 오펜하이머를 그린 영화 후반부가 더욱 흥미로웠다. 자신을 나락으로 밀어낸 인물이 뻔뻔하게 손을 내밀어도 씩 웃으며 맞잡아 준다. 의회의 비공개 심문에도 시달린다. 스트로스는 인류를 핵재앙으로 이끈 데 대한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순교자인 척 군다고 폭로하는데 전혀 틀린 말은 아닌 듯했다.

그리고 해리 트루먼 대통령 접견 장면. 수소폭탄 개발 계획을 포기하고 핵감축 협정에 나서라고 주장하는 오펜하이머를 매몰차게 쫓아낸 대통령은 비수를 날린다. “징징거리는 애들은 앞으로 내 방에 들이지 마!”

원자폭탄 실험이 예상 외로 큰 성공을 거둔 뒤 폭탄을 싣고 떠나는 그로브스 대령이 “(당신네 과학자들 일은) 여기까지!”라고 말했을 때 그는 벌써 알았을 것이다. 뭐든지 빨리 배우고 익히는 오펜하이머가 이렇게 될 줄 몰랐을 리 없다. 이른바 ‘공포의 균형’이 맞춰지지 않을 것이란 것, 러시아가 5977개, 미국이 5428개(지난해 미국과학자연맹 집계) 갖는 데 이를 것이란 것을 몰랐을 리 없다. 해서 마지막 장면이 원자폭탄들이 구름 위로 치솟는 것을 보며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그의 얼굴이었던 것은 너무 당연했다.

놀런 감독의 ‘인터스텔라’(2014)가 계속 떠오른 것은 두 영화가 절멸(絶滅)에 대한 두려움을 깊이 공유하기 때문이다. ‘인터스텔라’ 앞 대목은 옥수수밭이 불타고 사람들이 마스크를 써야만 생활이 가능한 지구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 영화를 처음 봤을 때는 먼 미래의 일로 여겨졌는데 지금 우리는 묵시록에서나 볼 법한 장면들을 너무나 많이 목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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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훨씬 여러 갈래가 됐다. 80년 전처럼 미국과 소련이란 강력한 주도 세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핵감축 협상이 중단된 것이 3년이 넘었는데도 아무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약육강식에 각자도생이다. 오펜하이머도 느꼈듯, 더 공포스러운 것은 폭탄이 아니라 인류, 사람들이었다.
2023-08-25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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