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섶에서] 먹물/함혜리 논설위원

[길섶에서] 먹물/함혜리 논설위원

입력 2009-06-25 00:00
수정 2009-06-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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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글씨를 배우기 시작했다. 한달 가까이 가로, 세로 줄긋기를 하며 붓 다루는 연습을 하다가 이제 겨우 글 몇자 쓰는 수준이다. 꾸준히 연습을 해야 한다기에 집에도 나름대로 서실 구색을 갖췄다.

그런데 좀처럼 시간이 나지 않았다. 종이만 펼쳐진 채로 몇날 며칠 세월을 보내다 어느날 밤 문득 글씨를 쓰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필’이 꽂힌 거다.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교자상 앞에 앉아 벼루에 먹물을 따랐다. 마음에 드는 글씨가 나오지 않았다. 몇글자 반복해서 쓰다 보니 어느새 벼루의 먹물이 다 없어졌다. 좀 더 잘 써보겠다는 생각에 먹물을 다시 따랐다. 하지만 체력은 이미 바닥난 상태. 졸립기도 하고 어깨도 아팠다. 그만 쓸까 하다가 먹물을 남기면 죽어서 그걸 다 마셔야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생각났다. 시커먼 먹물을 마시느니 조금 참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먹물이 다 없어질 때까지 글씨를 쓰긴 했는데 며칠 동안 담이 결려서 고생했다. 하룻밤 사이에 서예의 경지에 오를 리도 없거늘 먹물은 왜 부어가지고. 언제나 그놈의 욕심이 문제다.

함혜리 논설위원 lotus@seoul.co.kr

2009-06-25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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