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뉴질랜드를 여행 중이다. 보고 있는 뉴질랜드의 모습은 한마디로 맑고 청정하다. 산천은 물론 시가까지 태초의 모습처럼 청정한데 어찌 마음인들 청정하지 않겠는가.
경전 말씀에서도 몸(身)이 청정해야 마음(心)이 청정하고 몸(환경)과 마음이 청정해야 법계가 청정하다 했듯이 뉴질랜드 사람들의 마음 또한 국토만큼 청정하다.
범속한 사람들은 대자연 앞에 만물의 지배자로서 인간의 흔적을 남기고자 한다. 아름답고 특별한 것일수록 제 것으로 만들고자 한다. 그러나 뉴질랜드 사람들은 지극히 아름답고 청정한 곳일수록, 그 아름다움이 훼손되지 않는 가운데 느껴질 만한 곳에 작은 둥지를 틀고 그 아름다움을 함께 바라다 볼 줄 아는 절제된 감정과 이성을 지닌 사람들 같다. 수십척 깊이가 한눈에 들여다보이는 수정같은 맑은 물 속에 눈길이 멈출 때, 경관이 빼어난 곳에는 예외없이 매운탕집과 러브호텔을 지어 돈벌이에 열을 올리는 우리의 무례가 더없이 부끄럽다.
자연에 대한 뉴질랜드의 맑고 깊은 마음은 어디서 왔을까? 부끄러운 우리의 심사와 태도는 어디서부터 시작될까? 한마디로 그것은 차분한 이성적 사고와 판단, 그리고 상황에 따른 합리적 선택, 이것을 얼마나 중요시하느냐 여부인 것 같다.
뉴질랜드에서는 종교적 신념을 공공장소에서 선전할 수 없다 그리고 상대의 요청이나 동의가 없는 가운데 자기와 같은 종교를 믿도록 요구할 수 없다. 이런 규제 때문에 한국에서 오신 선교사님들이 선교활동하기에 매우 힘든 곳 중 하나가 뉴질랜드라고 한다.
선교활동과 관련하여 유사한 이야기를 지난해에도 들었다.6월 몽골에서, 그리고 10월 스리랑카에서이다. 그때는 약소국가가 자국의 중심 종교를 보호하기 위해, 국가 정체성 유지라는 명분을 세운 배타적 규제 법률을 제정한 것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지금 뉴질랜드에서 들은 규제의 의미는 사뭇 다르다.
기독교 문화 전통을 가진 뉴질랜드에서 자유로운 선교활동에 제한을 줄 수밖에 없는 규제적 제도를 둔 것은 종교 선택과 사상의 자유 보장이전에, 기대하는 더 깊은 목적과 원칙이 있어 보인다. 그것은 인간 이성에 대한 국민적 신뢰와 이성에 기초한 사회적 합의가 가능한 사고력 증진 원칙에 있는 것 같다. 무조건적이고, 무원칙이고, 원리가 없는 신념이 가져온 몽매함의 역사를 알기 때문이다. 종교적 신념은 최근에도 9·11테러와 이라크 침략을 서슴지 않았다.
이런 불행은 우리 정치사회에도 있다. 역대 대통령이 합리적 선택과 합의보다 신념에 의한 통치로 실패한 역사를 썼고, 지금 대통령도 잘못한 것도 없는 것 같은 가운데 저질러진 잘못으로 철저히 외면당하고 있다.
이처럼 이성적 타협과 합의를 모르는, 신념이 판치는 세상을 만드는 씨앗은 누가 뿌려왔고 지금 누가 뿌리고 있는가? 아무래도 종교인들인 것 같다. 감성적 신념의 베일을 치우고, 신념 말고는 어떤 사항도 살피려 하지 않는 무지를 종교적 순수를 지닌 신도인 양 부추겨 세우는 성직자에 의해 그 씨가 뿌려지고 종교의 상업주의적 이용과 집착이 이를 싹트고 자라게 한다.
우리 종교인은, 신념에 매몰된 신자보다 순수한 이성을 지닌 국민정신을 위해 종교활동마저 규제하는 뉴질랜드의 원칙을 본받아야 한다.
이제부터라도 모든 종교인이 기득권을 포기하고 자성과, 깨어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순수로 돌아갈 때 모든 사람의 마음은 청정해지고, 이성적 사고를 가진 청정한 사람들의 사회는 청정할 것이며, 뉴질랜드보다 청정한 금수강산이 다시 우리 곁으로 되돌아올 것이다.
그동안 내 생각을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준 서울신문과 이를 지켜봐 준 분들에게 감사한다.
현고 스님 전 조계종 종무원장 대행
경전 말씀에서도 몸(身)이 청정해야 마음(心)이 청정하고 몸(환경)과 마음이 청정해야 법계가 청정하다 했듯이 뉴질랜드 사람들의 마음 또한 국토만큼 청정하다.
범속한 사람들은 대자연 앞에 만물의 지배자로서 인간의 흔적을 남기고자 한다. 아름답고 특별한 것일수록 제 것으로 만들고자 한다. 그러나 뉴질랜드 사람들은 지극히 아름답고 청정한 곳일수록, 그 아름다움이 훼손되지 않는 가운데 느껴질 만한 곳에 작은 둥지를 틀고 그 아름다움을 함께 바라다 볼 줄 아는 절제된 감정과 이성을 지닌 사람들 같다. 수십척 깊이가 한눈에 들여다보이는 수정같은 맑은 물 속에 눈길이 멈출 때, 경관이 빼어난 곳에는 예외없이 매운탕집과 러브호텔을 지어 돈벌이에 열을 올리는 우리의 무례가 더없이 부끄럽다.
자연에 대한 뉴질랜드의 맑고 깊은 마음은 어디서 왔을까? 부끄러운 우리의 심사와 태도는 어디서부터 시작될까? 한마디로 그것은 차분한 이성적 사고와 판단, 그리고 상황에 따른 합리적 선택, 이것을 얼마나 중요시하느냐 여부인 것 같다.
뉴질랜드에서는 종교적 신념을 공공장소에서 선전할 수 없다 그리고 상대의 요청이나 동의가 없는 가운데 자기와 같은 종교를 믿도록 요구할 수 없다. 이런 규제 때문에 한국에서 오신 선교사님들이 선교활동하기에 매우 힘든 곳 중 하나가 뉴질랜드라고 한다.
선교활동과 관련하여 유사한 이야기를 지난해에도 들었다.6월 몽골에서, 그리고 10월 스리랑카에서이다. 그때는 약소국가가 자국의 중심 종교를 보호하기 위해, 국가 정체성 유지라는 명분을 세운 배타적 규제 법률을 제정한 것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지금 뉴질랜드에서 들은 규제의 의미는 사뭇 다르다.
기독교 문화 전통을 가진 뉴질랜드에서 자유로운 선교활동에 제한을 줄 수밖에 없는 규제적 제도를 둔 것은 종교 선택과 사상의 자유 보장이전에, 기대하는 더 깊은 목적과 원칙이 있어 보인다. 그것은 인간 이성에 대한 국민적 신뢰와 이성에 기초한 사회적 합의가 가능한 사고력 증진 원칙에 있는 것 같다. 무조건적이고, 무원칙이고, 원리가 없는 신념이 가져온 몽매함의 역사를 알기 때문이다. 종교적 신념은 최근에도 9·11테러와 이라크 침략을 서슴지 않았다.
이런 불행은 우리 정치사회에도 있다. 역대 대통령이 합리적 선택과 합의보다 신념에 의한 통치로 실패한 역사를 썼고, 지금 대통령도 잘못한 것도 없는 것 같은 가운데 저질러진 잘못으로 철저히 외면당하고 있다.
이처럼 이성적 타협과 합의를 모르는, 신념이 판치는 세상을 만드는 씨앗은 누가 뿌려왔고 지금 누가 뿌리고 있는가? 아무래도 종교인들인 것 같다. 감성적 신념의 베일을 치우고, 신념 말고는 어떤 사항도 살피려 하지 않는 무지를 종교적 순수를 지닌 신도인 양 부추겨 세우는 성직자에 의해 그 씨가 뿌려지고 종교의 상업주의적 이용과 집착이 이를 싹트고 자라게 한다.
우리 종교인은, 신념에 매몰된 신자보다 순수한 이성을 지닌 국민정신을 위해 종교활동마저 규제하는 뉴질랜드의 원칙을 본받아야 한다.
이제부터라도 모든 종교인이 기득권을 포기하고 자성과, 깨어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순수로 돌아갈 때 모든 사람의 마음은 청정해지고, 이성적 사고를 가진 청정한 사람들의 사회는 청정할 것이며, 뉴질랜드보다 청정한 금수강산이 다시 우리 곁으로 되돌아올 것이다.
그동안 내 생각을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준 서울신문과 이를 지켜봐 준 분들에게 감사한다.
현고 스님 전 조계종 종무원장 대행
2006-12-16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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