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 저출산시대,‘부모노릇’의 재음미/강영혜 한국교육개발원 연구위원

[열린세상] 저출산시대,‘부모노릇’의 재음미/강영혜 한국교육개발원 연구위원

입력 2006-10-27 00:00
수정 2006-10-27 00:00
  • 기사 읽어주기
    다시듣기
  • 글씨 크기 조절
  • 댓글
    0
얼마 전 집 근처 절에서 열린 불교경전 판화 전시회에 간 적이 있다. 다양한 시기에 간행된 경전들을 구경하다가 ‘부모은중경’이라는 낯익은 제목 앞에 발길이 머물렀다. 부모의 소중한 은혜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록했다는 이 책에서는 부모의 은혜 10가지를 글과 그림으로 깨우쳐 주고 있다. 자녀를 잉태하면서부터 시작되는 부모의 수고와 은혜 중 9번째 은혜는, 자식을 위해 나쁜 일(악업)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다소 의외의 가르침이다. 악업의 구체적 사례가 적시되지 않아 옛날 어머니들이 어떤 악업을 행했는지 알 길이 없지만, 혹시 이를 표피적으로 받아들인 모성문화가 오늘날 도를 넘는 교육열로 이어진 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필자도 20년 넘게 부모노릇을 해 오면서 많은 것을 참고 견뎌야 하는 부모됨을 도 닦는 일에 비교하곤 한다. 그러나 자식을 핑계로 한 악업까지도 부모노릇에 포함된다고 여긴 적은 없다. 내가 특별히 도덕적이어서가 아니라 악업이 자녀에게 진정한 이익을 줄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얼마 전 언론 보도에 의하면 우리나라 신용불량자 10명 중 1명은 자녀의 사교육비 때문에 신용불량자가 된다면서 부모를 신용불량자로 만드는 교육을 문제 삼았다. 우리 교육에 문제가 없지 않지만, 신용불량자가 된 부모들을 변명하기 위해 교육을 끌어들이는 것은 곤란하다고 본다. 교육이란 자녀들이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자라서 올바른 판단을 하며 제대로 살아가도록 이끄는 과정이다. 그런데 자녀의 성적을 올리자고 빚을 지고 가정이 파산하게 된다면 자녀가 어떻게 건전한 경제관을 갖고 자기 앞날을 엮어 갈 수 있을 것인가. 과외 덕분에 조금 더 나은 대학에 들어간다 한들 경제적 궁핍에 시달리며 집안을 다시 일으켜야 할 짐을 진 자녀의 미래는 암울할 뿐이다. 그런 점에서 분별없는 교육 투자를 부모됨의 악업으로 포장하는 것은 비겁한 일이다.

부모 악업의 또 다른 버전은 자녀의 과외비를 벌기 위해 유흥업소 도우미로 나가는 경우이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했으니 생계를 위해 노래방 도우미가 되는 것을 흉볼 수는 없지만, 자녀의 과외비 마련을 위해서라면 문제가 다르다. 미성년 자녀에게 부모의 상습적인 늦은 귀가, 특히 술에 전 부모의 자기희생 타령이 좋은 작용을 할 리 없다. 일을 하는 동기나 목적이 부모 자신의 이익과는 관계없이 오직 자녀를 위한 억지 희생일 뿐이라면 이는 자녀가 되갚아야 할 굴레로 작용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몇 년 전 영국에 머물 때 자녀교육에서 부모의 적절한 관여가 중요하며, 특히 아버지의 참여가 중요하다는 점을 집중 부각하는 광경을 목격했다. 지난해 30대 후반의 여성 경제전문가가 교육부장관으로 임명되자 남편은 어린 네 자녀를 돌보고자 직장을 그만두었다고 한다. 자녀의 행복과 교육적 성공을 위해 돈보다 부모와 자녀의 유대를 더 중시한 것이다. 따라서 젊은 전문직사회에서는 어린 자녀를 돌보기 위해 부부가 함께 파트타임으로 고용계약을 바꾸는 일도 드물지 않다. 정규직은 풀타임이라는 우리의 고정관념과는 달리 어린 자녀를 둔 부모들을 위해 정규직 파트타임제가 다양한 형태로 작동하고 있었다. 고용 환경이 가족친화적으로 바뀌지 않으면 출산기피로 이어져 사회적 존립이 위태로워진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서는 부모의 정성어린 보살핌보다 돈이 자녀교육의 선결조건으로 여겨지면서 세계 최악의 저출산 사태를 낳고 있다. 자녀교육에 돈도 어느 정도 필요하지만 성장기 자녀에게 최고의 선물은 부모가 함께해 주는 것이다. 자녀교육을 핑계로 한 악업, 서로에게 짐이 돈벌이를 부모의 본분인 양 포장하는 것은 곤란하다.



강영혜 한국교육개발원 연구위원
2006-10-27 30면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close button
많이 본 뉴스
1 / 3
탈모약에 대한 건강보험 적용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재명 대통령이 보건복지부 업무보고에서 “탈모는 생존의 문제”라며 보건복지부에 탈모 치료제 건강보험 적용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대통령의 발언을 계기로 탈모를 질병으로 볼 것인지, 미용의 영역으로 볼 것인지를 둘러싼 논쟁이 정치권과 의료계, 온라인 커뮤니티로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당신의 생각은?
1. 건강보험 적용이 돼야한다.
2. 건강보험 적용을 해선 안된다.
광고삭제
광고삭제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