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마당] 인문학의 밭과 시장/황현산 문학평론가·고려대 불문과 교수

[문화마당] 인문학의 밭과 시장/황현산 문학평론가·고려대 불문과 교수

입력 2006-10-19 00:00
수정 2006-10-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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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대학의 교수들이 인문학 선언을 하고, 전국 대학의 인문학 교수들이 협력하여 인문학 주간이라는 이름으로 특별한 행사를 했던 것이 한 달 전의 일이다. 그래서 제법 세간의 눈길을 끌기도 했지만, 이런 일이 늘 그렇듯이 그 관심이 오래 지속될 것 같지는 않다. 게다가 ‘위기가 있다면 그것은 인문학의 위기가 아니라 인문학자들의 위기다.’라는 말이 뒤따라 튀어나와 이 일에 관계한 사람들의 뒤통수를 때리기도 했다. 아마도 이 말은 ‘너희 인문학자들이 해놓은 일이 무엇이냐.’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을 터인데, 나 같이 인문학에 발 딛고 있는 사람의 처지에서는 적잖이 원망스러운 말이다.

짧게 말한다면 우리의 인문학자들이 울타리나 지키면서 놀고 있는 것은 아니며, 또 그렇게 처신할 수 있는 정황도 아니다. 인문학이 세상의 직접적인 관심에서 멀어지고 우수한 신진 인력들이 몸담을 수 있는 자리가 줄어든다고 해서, 인문학이 감당해야 할 영역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어서 인문학자 개인들이 떠맡아 책임져야 할 일은 그만큼 더 많아진다. 세간에서 흔히 말하듯 너덜거리는 강의 노트 하나로 10년,20년을 버티는 교수를 나는 본 적이 없다. 오히려 공부를 성실하게 부지런히 하는 사람일수록 표가 안 나는 일만 하게 되는 경우가 없지 않은 것이 이 학문의 성격이기도 해서, 세상에서 잊히고 스스로도 사기가 꺾인 나머지 자신의 일과 삶을 더듬어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같은 소설이라도 쓰고 싶은 심정이라고 고백하는 동료들을 이따금 만난다.

그렇다고 세상과 그 시장을 무턱대고 원망할 수는 없다. 역사적으로 본다면 시장과 시장의 욕망이야말로 인문학이 온갖 억압을 벗고 활동할 수 있는 터전이었고 그 발흥을 도운 동력이었다. 역사를 들먹일 것까지도 없다. 이제 그 시장이 아무리 왜곡되어 있다고는 해도, 세상과 사람을 이해하는 일이 인문학의 임무일진대, 인간들이 저마다 운명을 걸고 있는 그 시장에 대한 성찰의 책임을 어느 다른 손에 떠맡길 수는 없다.

게다가 우리의 인문학 시장은 넓으며, 그 시장을 통해 우리가 소비하는 인문학의 양은 적지 않다. 천만명의 관객 동원이 다반사로 되어버린 우리의 영화도, 동남아의 안방 깊숙이 파고들어간 우리의 방송 드라마도 그 배후에는 어떤 수준의 것이건 인문학이 있다. 각종 기록 영상물들은 말할 것도 없고, 단발성 화장품 광고들까지도 일정한 양의 학문과 예술의 성과를 소비한다. 누구는 활자의 시대가 저물었다고 말하지만, 각종 출판물을 통해서건 인터넷의 게시문과 댓글을 통해서건 우리 시대만큼 문자를 대량으로 소비하는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 인문학을 요구하고, 인문학이 충족시키고 개선시켜야 할 자리는 어느 시대보다도 많다.

문제는 인문학 소비 시장의 확장과 흥왕이 그 생산자들의 힘을 북돋워주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이는 마치 시장의 배추 값이 천정부지로 솟아올라도 밭에서 배추를 수확하는 농부는 그 생산비도 채 건지지 못하는 경우와도 같다. 예를 들자면 이렇다. 어느 명망 있는 번역가의 번역에 수많은 오류가 있다고 누군가 지적하면 일시에 사람들의 눈길이 쏠린다. 그러나 전문적인 수준에서 번역의 문체와 수사를 분석하고 그 윤리성과 인문학적 의의를 논의하는 연구와 연구자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그의 연구는 온갖 우회로를 거쳐 수많은 번역 출판물에 이용되고, 그래서 한 권이라도 번역서를 읽은 사람은 그 혜택을 입기 마련이지만, 그 연구의 과정과 환경은 늘 사회의 관심 밖에 있다. 그래서 번역에 관한 논의는 오역이나 트집 잡는 원시적 수준에 머무르고 만다. 관심 밖의 연구에는 사회적 투자도 물론 없다.

이 지식 유통구조를 고칠 수 있는 길은 멀다. 그러나 소비시장의 사회적 투자를 기다리기 전에 생산자들이 제 생산품이 어떻게 소비되어 있는가를 먼저 살피는 일이 그 개선의 첫걸음인 것은 분명하다.



황현산 문학평론가·고려대 불문과 교수
2006-10-19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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