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줄날줄] 피플파워/육철수 논설위원

[씨줄날줄] 피플파워/육철수 논설위원

육철수 기자
입력 2006-02-27 00:00
수정 2006-02-27 00:00
  • 기사 읽어주기
    다시듣기
  • 글씨 크기 조절
  • 댓글
    0
위정자는 국민을 졸(卒)로 보면 큰코 다치기 십상이다. 흩어져 있을 땐 연약한 졸일지 몰라도, 뭉치면 어느 누구도 건드리기 쉽지 않은 것 또한 졸이어서다. 장기판에서 졸이 2∼3개만 딱 붙어 있으면 제 아무리 날고 뛰는 마(馬)·차(車)라도 졸을 취하거나, 방어벽을 뚫기 어려운 것과 같은 이치다. 예로부터 군주(국가지도자)가 백성(국민)을 두려워하고 때로는 하늘처럼 모신 까닭도 바로 졸의 이런 속성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성선설로 유명한 중국 전국시대 유학자 순자(荀子)는 이미 2300년 전에 ‘임금은 배요, 백성은 물’(君舟民水)이란 말로 군민(君民) 관계의 핵심을 찔렀다. 백성은 물과 같아 배를 띄울 수도, 뒤집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 말이 진리인 것은 분명한데, 국민을 ‘약졸´쯤으로 여기는 정치행태가 변하지 않는 걸 보면 역사에서 배우거나 깨닫지 못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쩔 수가 없나 보다.

필리핀에서는 지금 세번째 ‘피플파워(People’s Power:민중의 힘)’가 꿈틀대고 있다. 아로요 대통령의 실정과 정치부패, 경제파탄이 주요 원인이란다. 대통령 하야 시위가 격화되고 국가비상사태까지 선포됐으니 장래가 매우 불투명해졌다. 이 나라의 피플파워는 정치적 고비마다 튀어나와 국가지도자를 바꾼 전력을 갖고 있는 터라, 이번 결말이 어떻게 날지 더욱 걱정스럽다.

필리핀 국민은 꼭 20년 전인 1986년 2월, 독재자 마르코스 대통령을 쫓아냈으며(1차 피플파워),2001년 초에는 영화배우 출신인 에스트라다 대통령을 하야시켰다(2차 피플파워). 그런데도 부와 권력을 마르코스·아키노·아로요 가문을 중심으로 한 150개 족벌이 여전히 독점하고 있다. 정권을 수차례 갈아치워도 민생은 별반 나아진 게 없으니 국민이 불만을 갖는 것도 당연하다 하겠다.

그러나 필리핀의 정치적 악순환과 경제침체는 ‘배’와 ‘물’ 모두의 문제로 보는 게 타당할 것 같다. 각종 선거 때마다 시원찮은 배를 만들어 놓고 자주 뒤집어 엎는 물에도 문제는 많기 때문이다. 썩은 정치세력과의 고리를 단호하게 끊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피플파워일 것이며, 국민이 대접받는 지름길이 아닌가 싶다.

육철수 논설위원 ycs@seoul.co.kr
2006-02-27 27면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close button
많이 본 뉴스
1 / 3
광고삭제
광고삭제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