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어느 일간지는 ‘학력과잉의 덫’에 대한 기사로 사회에 적지 않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외국의 유명 대학의 박사 학위 소지자가 학사주점에서 ‘경리 겸 웨이터’로 근무하고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 고생 끝에 대학 학위를 취득하고도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직장’을 다니는 사람들, 아니 ‘너무 배워서’ 실업자로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매우 극적인 사건이다. 학력과잉, 과잉교육은 경제적 요구에 맞지 않게 교육증서의 소유자, 즉 졸업자들이 넘치는 현상을 지칭하는 교육경제학의 용어이다. 일반적으로 학력과잉의 원인으로 크게 세가지 사항을 지적할 수 있다. 먼저, 경제적 수요와 필요를 초과하는 대학교육의 수요자의 등장이다. 그리고 학교기관이 많아져서 대학교육의 기회가 많아졌다는 점. 마지막으로 미래의 인력 수요예측을 잘못한 국가의 잘못.
사실,‘너무 배워 슬픈 사람들’은 최근의 일만은 아니다. 다만 현재 상황의 심각성을 그같은 개인적인 좌절과 숙명이 일반화되고 보편화되고 있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고교 졸업자의 80% 이상이 대학에 진학하고 있다. 하지만 ‘고학력 일자리’는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나아가 미취업 고학력자들의 ‘하향취업’으로 ‘저학력자를 몰아내는 경쟁’은 이미 가시화되고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원인에 대한 적절한 대처가 필요하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 그래서 ‘전문가’들은 다양한 처방을 제시한다. 필요 이상의, 즉 ‘분수에 넘치는’ 교육을 요구하는 학생과 학부모에게 ‘따끔한 질책’은 물론이고, 대학의 난립을 ‘자행’하고 있는 ‘무책임한’ 사학 운영자들에 대한 추궁, 그리고 노동시장의 요구를 무시하고 대학의 난립을 실행하고 방조한 정부에 대한 비판.
학력과잉의 문제를 일으키는 행위자들에 대한 질책과 추궁, 그리고 비판의 결론은 결국 보다 엄격한 선발제도로 복귀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싱가포르의 교육제도가 최근 주목받고 있다. 어느 한 경제신문의 기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싱가포르의 유일한 자원은 사람이며 인재양성이 국가의 가장 중요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 국민에게 일정 수준 이상의 재능을 갖게 하겠다는 평등주의적 접근법은 일찌감치 포기했다.”
싱가포르 교육제도는 과거 유럽에서 일반적으로 시행되던 ‘조기선발형’ 제도, 즉 엘리트 중심적인 제도이다. 이 제도에서는 초등학교 4학년에서 아이의 미래가, 대학진학과 직업교육 여부가 결정된다. 물론 후에 이를 교정할 기회가 제공되지만 과거 유럽의 경험에서 알 수 있듯이 이러한 교정기회는 말 그대로 ‘이론적 기회’일 뿐이다.
과거 유럽에서 시행되었던, 그러나 현재에는 포기된 조기선발을 ‘과감히’ 현재화하고 있는 싱가포르의 경험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물론 그러한 교육제도를 우리나라에 도입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단언컨대, 개인들의 교육적 요구에 대한 국가의 제한과 개입은 한국에서 불가능하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대체 ‘누가’ ‘어떤 의도로’ 이를 주장하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사실 구체적인 증거 제시 없이 추측에 근거한 논의는 ‘음모론’적 주장을 넘어서지 못할 것이다. 대신에 학력과잉의 문제에서 기업들이 ‘오묘한 방식’으로 비켜서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학력과잉이라는 개념의 준거점이 기업을 포함한 고용부문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왜 기업이 이 문제에 대한 원인 진단과 처방에서 비켜서 있어야 하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
‘구조조정’이라는 멋진 표현으로 포장된 일자리 축소가 세계경쟁이 강화되고 있는 현실에서 경쟁력 고양을 위한 최고의 명약임을 확신하는 기업의 논리는 별로 도전받고 있지 않다. 그런데 사교육 부문, 대학과 함께 학력과잉의 최대 수혜자는,‘자원’을 값싸게 공급받는(물론 그 자원이 ‘부실’하다는 푸념도 하지만) 기업이 아니던가? 문제에 대한 고민은 그것으로부터 이익을 취하는 자들을 포함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일 터, 여하튼 뭔가 수상하다.
전상진 서강대 사회학 교수
사실,‘너무 배워 슬픈 사람들’은 최근의 일만은 아니다. 다만 현재 상황의 심각성을 그같은 개인적인 좌절과 숙명이 일반화되고 보편화되고 있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고교 졸업자의 80% 이상이 대학에 진학하고 있다. 하지만 ‘고학력 일자리’는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나아가 미취업 고학력자들의 ‘하향취업’으로 ‘저학력자를 몰아내는 경쟁’은 이미 가시화되고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원인에 대한 적절한 대처가 필요하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 그래서 ‘전문가’들은 다양한 처방을 제시한다. 필요 이상의, 즉 ‘분수에 넘치는’ 교육을 요구하는 학생과 학부모에게 ‘따끔한 질책’은 물론이고, 대학의 난립을 ‘자행’하고 있는 ‘무책임한’ 사학 운영자들에 대한 추궁, 그리고 노동시장의 요구를 무시하고 대학의 난립을 실행하고 방조한 정부에 대한 비판.
학력과잉의 문제를 일으키는 행위자들에 대한 질책과 추궁, 그리고 비판의 결론은 결국 보다 엄격한 선발제도로 복귀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싱가포르의 교육제도가 최근 주목받고 있다. 어느 한 경제신문의 기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싱가포르의 유일한 자원은 사람이며 인재양성이 국가의 가장 중요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 국민에게 일정 수준 이상의 재능을 갖게 하겠다는 평등주의적 접근법은 일찌감치 포기했다.”
싱가포르 교육제도는 과거 유럽에서 일반적으로 시행되던 ‘조기선발형’ 제도, 즉 엘리트 중심적인 제도이다. 이 제도에서는 초등학교 4학년에서 아이의 미래가, 대학진학과 직업교육 여부가 결정된다. 물론 후에 이를 교정할 기회가 제공되지만 과거 유럽의 경험에서 알 수 있듯이 이러한 교정기회는 말 그대로 ‘이론적 기회’일 뿐이다.
과거 유럽에서 시행되었던, 그러나 현재에는 포기된 조기선발을 ‘과감히’ 현재화하고 있는 싱가포르의 경험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물론 그러한 교육제도를 우리나라에 도입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단언컨대, 개인들의 교육적 요구에 대한 국가의 제한과 개입은 한국에서 불가능하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대체 ‘누가’ ‘어떤 의도로’ 이를 주장하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사실 구체적인 증거 제시 없이 추측에 근거한 논의는 ‘음모론’적 주장을 넘어서지 못할 것이다. 대신에 학력과잉의 문제에서 기업들이 ‘오묘한 방식’으로 비켜서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학력과잉이라는 개념의 준거점이 기업을 포함한 고용부문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왜 기업이 이 문제에 대한 원인 진단과 처방에서 비켜서 있어야 하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
‘구조조정’이라는 멋진 표현으로 포장된 일자리 축소가 세계경쟁이 강화되고 있는 현실에서 경쟁력 고양을 위한 최고의 명약임을 확신하는 기업의 논리는 별로 도전받고 있지 않다. 그런데 사교육 부문, 대학과 함께 학력과잉의 최대 수혜자는,‘자원’을 값싸게 공급받는(물론 그 자원이 ‘부실’하다는 푸념도 하지만) 기업이 아니던가? 문제에 대한 고민은 그것으로부터 이익을 취하는 자들을 포함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일 터, 여하튼 뭔가 수상하다.
전상진 서강대 사회학 교수
2005-10-04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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