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딜 가나 돈이, 아니 돈 가진 사람들이 말썽의 중심에 자리잡은 걸 보는 심정은 늘 착잡하다. 문민정부 시절 안기부의 불법 도청으로 불거진 ‘X파일’ 문제로 나라는 온통 벌집 쑤신 듯 어수선하다. 사회지도층을 도청한 테이프를 다 털어놓으면 어마어마한 파괴력이 있을 거라니, 아마 나라가 발칵 뒤집힐지도 모를 일이다. 남의 말을 엿들어 통치에 악용하는 위정자들의 사악함이나, 돈으로 정권을 창출할 수 있다는 가진자의 교만함에는 이젠 두 손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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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철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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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철수 논설위원
돈과 정치에 얽힌 반갑잖은 소식을 또 접하면서 문득 몇해전 어느 논객이 쓴 글이 떠오른다. 그는 정치자금과 관련해서 돈의 속성을 나름대로 재치있게 소개했다. 돈에는 눈이 달리고 코가 달려서 용케 권력을 알아보고 쫓아다닌다는 게 요지였다. 의도는 충분히 알겠는데 그 글을 읽고 난 뒤 혼자서 쓴웃음을 지었던 기억이 난다.
한 번 따져보자. 만원짜리 지폐 앞뒤 어디를 살펴봐도 이목구비는 달려 있지 않다. 일은 돈을 쓰는 사람이 다 저질러 놓고 괜히 애꿎은 돈한테 죄를 뒤집어 씌우는 것 같아서였다. 돈이란 가진자의 마음가는 대로 따라간다는 게 보다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물론 권력이든 경제적 이익이든 ‘수익’이 보장되는 곳으로….
지금 시중에는 새 투자처를 노리는 수백조원이 오도가도 못한다며 아우성이다. 벌써 몇달째 우리 경제의 고정 레퍼토리다. 기업은 기업대로 부자는 부자대로 정부의 강공으로 돈이 코너에 몰린 형국이다. 미래가 불확실하고 투자수익이 확실치 않으니 돈 가진자들의 마음이 움직일 리 없다. 정부가 부동산 투기로 얻은 이익을 한푼도 남김 없이 환수하겠다고 벼르고, 으름장을 놓아도 적당한 퇴로조차 없으니 숨통이 막힐 지경이라고 한다.
요즘 들어 정부가 워낙 초강경으로 투기를 몰아치니까 집값이 다소 진정세로 돌아서는 현상은 다행이다. 일부 자금은 증시로 이동하는 조짐도 보인다. 그러나 부동산에 갇힌 뭉칫돈은 여전히 미동도 없다. 이럴 때 돈의 속성, 아니 기업이나 부자들의 마음을 제대로 읽을 줄 아는 정책입안자라도 나서 교통정리를 해주면 좋을 텐데, 유감스럽게도 그런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
돈은 사실 그 성격을 가리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누가 봐도 확실한 경우를 제외하고, 그것이 투자자금인지 투기자금인지는 제아무리 경제학 박사학위 수십개를 갖고 있어도 가려낼 재간은 없다. 따라서 부동산에 들어있는 자금을 일단 투기성으로 간주하는 정부의 태도는 문제다. 그러니 돈만 가졌다 하면 아무한테나 대고 윽박지르는 게 대책의 전부다.
돈이 부동산에 지나치게 묻혀있거나 은행에서 쉬고 있는 단기자금은 분명 나라경제의 손실이다. 불로소득이나 탈루·탈세·불법 행위는 법대로 엄격하게 제어하되, 건전한 자금은 빨리 생산성 있는 곳으로 유도해 주는 것이 정부가 할 일이다.
옛날 전제군주시대에는 치산치수(治山治水)만 잘해도 훌륭한 군주 대접을 받았다. 농경이 경제의 전부나 다름없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세상이 너무 복잡하고 다양해졌다. 그래서 지도층에게 필요한 덕목 하나를 더 꼽자면 바로 돈 다스리기,‘치금(治金)’ 능력이라 할 수 있겠다. 국가지도자는 물론이고 각계각층의 사회지도층과 부자 등, 권력이나 부를 가진자 모두에게 필요한 덕목이다. 돈이 권력이나 이권을 무리하게 쫓아다니지 않고 국리민복과 산업발전 등 유용한 곳으로 흘러가도록 이끄는 치금술이 아쉬운 지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