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의 ‘파이프’보다 휠씬 맛깔스런 우리말이 빨부리 일 것이다. 어렸을 때 아버지의 애장품이었던 손가락만한 상아 ‘빨부리’는 끽연의 소도구라는 것 말고 다른 용처도 있었다. 느닷없이 ‘딱’하고 내 이마를 때려 졸음을 쫓거나, 과실을 꾸짖는 일상의 죽비였던 셈이다.
일 끝에 담배 한 대를 맛나게 피운 아버지. 나락 털린 볏짚에서 초리를 뽑아 빨부리를 청소하곤 했다. 담뱃진이 눅진하게 엉겨붙어 냄새는 고약했지만 그 진이 하얀 상아에 배어들어 빨부리 주둥이가 마치 호박처럼 고운 담황색으로 물들어 눈길을 끌었다. 그 은은한 색조의 깊이를 따라 노동의 힘겨움이 사그라졌고, 또한 아버지의 한 시절도 시들어 갔으니….
세월이 흘러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상방(喪房) 영전에 놓인 빨부리에 눈길이 닿아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아버지는 책을 읽다가 이내 졸음에 빠지곤 하는 내 이마를 그 빨부리로 튕기신 뒤 이렇게 놀리곤 하셨다.“잠귀신이 씌면 종국에는 빌어먹지도 못하게 되니, 내가 미리 잡도리했다.” 그런 내가 요새는 잠에 빠지면 헤어나지를 못하니 아무래도 그때 아버지의 축귀(逐鬼)가 잘못된 건 아닐까.
심재억 문화부 차장 jeshim@seoul.co.kr
일 끝에 담배 한 대를 맛나게 피운 아버지. 나락 털린 볏짚에서 초리를 뽑아 빨부리를 청소하곤 했다. 담뱃진이 눅진하게 엉겨붙어 냄새는 고약했지만 그 진이 하얀 상아에 배어들어 빨부리 주둥이가 마치 호박처럼 고운 담황색으로 물들어 눈길을 끌었다. 그 은은한 색조의 깊이를 따라 노동의 힘겨움이 사그라졌고, 또한 아버지의 한 시절도 시들어 갔으니….
세월이 흘러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상방(喪房) 영전에 놓인 빨부리에 눈길이 닿아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아버지는 책을 읽다가 이내 졸음에 빠지곤 하는 내 이마를 그 빨부리로 튕기신 뒤 이렇게 놀리곤 하셨다.“잠귀신이 씌면 종국에는 빌어먹지도 못하게 되니, 내가 미리 잡도리했다.” 그런 내가 요새는 잠에 빠지면 헤어나지를 못하니 아무래도 그때 아버지의 축귀(逐鬼)가 잘못된 건 아닐까.
심재억 문화부 차장 jeshim@seoul.co.kr
2005-03-15 22면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thumbnail - “큰소리 나면 쓰러져”…김다현 저격 심수봉 ‘이 병’ 앓고 있었다 [헬스픽]](https://img.seoul.co.kr/img/upload/2026/09/23/SSC_20260923131826_N2.jpg.webp)

![thumbnail - “1년 380번 술 마셨다”는 이봉원…‘술톤’ 싹 사라진 얼굴, ‘이것’ 때문[라이프]](https://img.seoul.co.kr/img/upload/2026/09/23/SSC_20260923101714_N2.jpg.webp)



![thumbnail - 한양 길목 지켰던 그림 같은 성곽, 넓은 초록 마당… 마음도 초록초록 [서동철의 이야기가 있는 옛성]](https://img.seoul.co.kr/img/upload//2026/09/23/SSC_20260923232032_N.jpg.web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