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여 년 전,어느 무더웠던 여름의 일이었을 것이다.선풍기 바람에 실려 간간이 매미 우는 소리가 들려오던 하숙집으로 한 통의 편지가 배달됐다.고등학교 졸업 후 소식이 아예 끊기다시피 했던 시골의 오랜 벗이었다.설레는 마음으로 봉투를 뜯자마자 시 한편이 얼굴을 불쑥 내민다.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그믐처럼 몇은 졸고/몇은 감기에 쿨럭이고/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지금은 어지간히 알려진 곽재구 시인의 ‘사평역에서’지만,당시는 같은 이름의 시집조차 출간되기 전이어서 제목은 물론 시인의 이름조차 생경한 편이었다.‘사평역’이 실재하지 않는 가상의 공간이라는 사실 역시 그때는 알 길이 없었다.하지만 기억은 때로 실재보다 선명한 것일까.편지가 지닌 이중의 의미를 알아차리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벗은 내가 찌는 듯한 더위를 고향 언저리의 겨울풍경에 대한 기억을 통해 이겨내 주길 원했을 것이다.동시에 도회지 생활에 묻혀 작은 정거장으로 상징되는 시골 이웃들의 고단하지만 넉넉한 삶을 잊지 않기를 바랐던 것이다.
‘사평역에서’가 그려낸 작은 정거장들은 언제부턴가 간이역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익숙해졌다.간이화장실,간이수도,간이식당….낱말 뜻 그대로 풀자면 간이역은 ‘간단하고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역’이다.실제로는 ‘역이긴 하지만 그 기능이 불완전하여 때로는 역이 해야 할 역할을 하지 않는 역’이라는 뜻이 더 강하다.
목적지를 향해 긴 거리를 최대한 빨리 주파해야 하는 직행열차들에게,간이역은 그저 스쳐 지나가면 되는 차창 밖 풍경에 지나지 않는다.이때 허름한 역사와 함께 기억의 뒤편으로 썰물처럼 사라져 가는 것은,소박했던 삶의 추억과 기다림에 기대어 분주하지 않았던 지난날의 가치들이다.
줄어드는 승객과 설비 기계화로 쇠락하고 있는 간이역이 ‘풀꽃상’의 열 번째 수상자로 선정됐다고 한다.선정 이유는 “간이역은 회복해야 할 느림과 반개발의 가치를 절박하게 웅변하고 있으며,파국을 향해 달리는 우리 시대의 눈물”이기 때문이다.
‘풀꽃상’ 주관자인 ‘풀꽃세상을 위한 모임’은 “무조건 빨리 달려야 한다는 속도중독증을 상징하는 고속철도가 멀쩡한 산을 뚫고 없어도 되는 다리를 놓으며,우리 산하의 핏줄을 끊고 생명체들을 절단내고 있다.”고 밝혀 간이역 선정이 속도에 대한 물신숭배의 상징인 고속철도를 겨냥하고 있음을 숨기지 않았다.
간이역과 고속철도의 극명한 대비는 단순히 속도와 관련한 가치인식의 차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비둘기호와 통일호는 물론 많은 돈을 들여 지은 지방공항까지 고사상태로 몰아넣고 있는 고속철도 건설도,건설경기 활성화 차원에서라도 행정수도 이전이 필요하다는 대통령의 주장도,내수경기 진작을 위해 골프장 230여개를 한꺼번에 허가하겠다는 경제부총리의 발언도 모두 그 뿌리는 토목사업을 벌여야 나라 경제를 유지할 수 있다는 낡은 믿음과 닿아 있다.
‘공사판 대한민국’ 그 어디에도 진정한 의미의 간이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이 무더위에 다시 한번 ‘사평역에서’를 꺼내 읽는 이유다.
안병옥 시민환경연구소 부소장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그믐처럼 몇은 졸고/몇은 감기에 쿨럭이고/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지금은 어지간히 알려진 곽재구 시인의 ‘사평역에서’지만,당시는 같은 이름의 시집조차 출간되기 전이어서 제목은 물론 시인의 이름조차 생경한 편이었다.‘사평역’이 실재하지 않는 가상의 공간이라는 사실 역시 그때는 알 길이 없었다.하지만 기억은 때로 실재보다 선명한 것일까.편지가 지닌 이중의 의미를 알아차리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벗은 내가 찌는 듯한 더위를 고향 언저리의 겨울풍경에 대한 기억을 통해 이겨내 주길 원했을 것이다.동시에 도회지 생활에 묻혀 작은 정거장으로 상징되는 시골 이웃들의 고단하지만 넉넉한 삶을 잊지 않기를 바랐던 것이다.
‘사평역에서’가 그려낸 작은 정거장들은 언제부턴가 간이역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익숙해졌다.간이화장실,간이수도,간이식당….낱말 뜻 그대로 풀자면 간이역은 ‘간단하고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역’이다.실제로는 ‘역이긴 하지만 그 기능이 불완전하여 때로는 역이 해야 할 역할을 하지 않는 역’이라는 뜻이 더 강하다.
목적지를 향해 긴 거리를 최대한 빨리 주파해야 하는 직행열차들에게,간이역은 그저 스쳐 지나가면 되는 차창 밖 풍경에 지나지 않는다.이때 허름한 역사와 함께 기억의 뒤편으로 썰물처럼 사라져 가는 것은,소박했던 삶의 추억과 기다림에 기대어 분주하지 않았던 지난날의 가치들이다.
줄어드는 승객과 설비 기계화로 쇠락하고 있는 간이역이 ‘풀꽃상’의 열 번째 수상자로 선정됐다고 한다.선정 이유는 “간이역은 회복해야 할 느림과 반개발의 가치를 절박하게 웅변하고 있으며,파국을 향해 달리는 우리 시대의 눈물”이기 때문이다.
‘풀꽃상’ 주관자인 ‘풀꽃세상을 위한 모임’은 “무조건 빨리 달려야 한다는 속도중독증을 상징하는 고속철도가 멀쩡한 산을 뚫고 없어도 되는 다리를 놓으며,우리 산하의 핏줄을 끊고 생명체들을 절단내고 있다.”고 밝혀 간이역 선정이 속도에 대한 물신숭배의 상징인 고속철도를 겨냥하고 있음을 숨기지 않았다.
간이역과 고속철도의 극명한 대비는 단순히 속도와 관련한 가치인식의 차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비둘기호와 통일호는 물론 많은 돈을 들여 지은 지방공항까지 고사상태로 몰아넣고 있는 고속철도 건설도,건설경기 활성화 차원에서라도 행정수도 이전이 필요하다는 대통령의 주장도,내수경기 진작을 위해 골프장 230여개를 한꺼번에 허가하겠다는 경제부총리의 발언도 모두 그 뿌리는 토목사업을 벌여야 나라 경제를 유지할 수 있다는 낡은 믿음과 닿아 있다.
‘공사판 대한민국’ 그 어디에도 진정한 의미의 간이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이 무더위에 다시 한번 ‘사평역에서’를 꺼내 읽는 이유다.
안병옥 시민환경연구소 부소장
2004-07-26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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