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현직 도지사에게 “도지사는 정치가입니까,행정가입니까.”하고 물어 보았다.그 대답은 “행정가이기도 하고 정치가이기도 하다.”는 것이었다.그렇다면 그 비율은 몇 퍼센트씩이냐고 다시 물어 보았다.“80퍼센트는 행정가이고 20퍼센트가 정치가입니다.”라는 대답을 듣고 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라면 반대로 대답했을 것입니다.도지사를 선거로 뽑는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도지사를 선거로 뽑는 이유는 공무원의 연장선에서 도민과 도정을 보지 말라는 뜻입니다.그리고 도민의 소리를 가슴으로 듣고 도민의 아픔을 마음으로 읽는 지도자를 뽑기 위한 것입니다.”
중앙정부를 운영하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정부를 운영하는 이상적인 모습은 유연하고 유능한 행정과 국민의 입장에서 관료를 부리는 정치가간의 창조적 협연(協演) 시스템이다.그러나 지난 세월동안 우리는 자질구레한 관례에 매달린 경직된 관료들과 대안도 없는 정치가들의 무기력한 협업시스템을 수도 없이 보아왔다.정치가 행정을 지도하지 못하고,관료주도형의 국정운영에 정치가가 기생하고 있는 양상으로 국정이 운영되어온 탓이었다.
정치란 국민의 꿈 서민의 꿈을 실현하려는 사업이다.그리고 이러한 사업에 있어서 공장과도 같은 것이 행정이다.따라서 선거로 뽑힌 지도자가 해야 할 첫 번째 과업은 다름 아닌 비능률적인 관료제와의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다.관료기구의 비뚤어진 모습은 빈약한 정치의 실태를 비추고 있는 거울이라는 것도 알아야 한다.
우리 국민들이 국회에 ‘도장’을 맡기고 있다면 행정부에게는 ‘통장’을 맡기고 있다고 비유해 볼 수 있다.도장을 맡은 의회가 ‘메뉴’를 결정하는 곳이라면,행정부는 ‘요리’를 하는 곳이다.그러나 지난 세월 우리의 국회는 새로운 메뉴를 짜내는 능력이 없어 요리사에게 통째로 맡기듯 관료에 의존해 왔다.그러고 나서는 요리사에게 일임해야 할 화덕과 양념에 대해 이런 저런 자질구레한 주문을 늘어놓았던 것이다.
정부의 내부로 들어가 보아도 마찬가지이다.정치가 행정을 지도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장관들이 소관부처를 영도하는 것이다.지도자로서의 장관은 자신이 담당하는 부처의 관료를 대표하고 대변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장관은 관료를 개조하고 부림으로써 사명과 정책을 실천하기 위해 존재하는 정치가이다.그러나 역대 장관 중에는 관료의 연장선상에서 문제를 인식하고,자진하여 관료의 대변인이 됨으로써 관료정치를 횡행하게 했던 사람이 많았다.관료들이 정치가를 부리는 나라를 장관들이 앞장서서 만들었던 것이다.
관료정치가 횡행하면 국민의 정치는 형해화(形骸化)되고 시민이 설 자리도 그만큼 좁아진다.지난 세월동안 우리 나라에서 정치의 정책 생산체제가 약했기 때문에 정치가는 관료에게 의존하게 되었다.그리고 장관에게 지혜와 경륜이 없었으므로 오히려 관료가 장관을 지도하는 것을 우리는 수없이 목격했다.장관들의 국회 답변 내용과 수준이 관료의 작문 수준에 달려 있었던 것도 이런 연유때문이었다.
아무리 유능하다고 할지라도 관료들은 국민과 국익을 대표하기보다는 부처의 이익을 대변하기가 쉽다.설령 국익을 대변한다 해도 그것은 부처의 이익이 허용하는 범위 내로 한정되는 경우가 많다.따라서 관료들이 그들의 편익 증대를 위한 조직 내부의 목적에 눈을 맞추는 만큼 국민의 이익을 외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장관들은 명심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부의 기능을 ‘배의 조타수’에 비유했다.정부의 기능을 조타수(操舵手)에 비유한 것은 정부가 ‘파일럿’의 소임을 수행해야 한다는 뜻이다.파일럿이란 큰배가 항구에 들어 갈 때나 나올 때에 길을 열어주는 도선사(導船士)를 말한다.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로 본다면 지금 우리 국민이 겪는 고통은 정부가 조타수로서의 기능을 다하게 하지 못한 정치력의 부재에서 기인한다.그리고 공무원이 부처이기주의에 빠져 있다면 그것은 장관이 조타수로서의 기능을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강형기 충북대 교수·한국지방자치학회 명예회장 ˝
“저라면 반대로 대답했을 것입니다.도지사를 선거로 뽑는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도지사를 선거로 뽑는 이유는 공무원의 연장선에서 도민과 도정을 보지 말라는 뜻입니다.그리고 도민의 소리를 가슴으로 듣고 도민의 아픔을 마음으로 읽는 지도자를 뽑기 위한 것입니다.”
중앙정부를 운영하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정부를 운영하는 이상적인 모습은 유연하고 유능한 행정과 국민의 입장에서 관료를 부리는 정치가간의 창조적 협연(協演) 시스템이다.그러나 지난 세월동안 우리는 자질구레한 관례에 매달린 경직된 관료들과 대안도 없는 정치가들의 무기력한 협업시스템을 수도 없이 보아왔다.정치가 행정을 지도하지 못하고,관료주도형의 국정운영에 정치가가 기생하고 있는 양상으로 국정이 운영되어온 탓이었다.
정치란 국민의 꿈 서민의 꿈을 실현하려는 사업이다.그리고 이러한 사업에 있어서 공장과도 같은 것이 행정이다.따라서 선거로 뽑힌 지도자가 해야 할 첫 번째 과업은 다름 아닌 비능률적인 관료제와의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다.관료기구의 비뚤어진 모습은 빈약한 정치의 실태를 비추고 있는 거울이라는 것도 알아야 한다.
우리 국민들이 국회에 ‘도장’을 맡기고 있다면 행정부에게는 ‘통장’을 맡기고 있다고 비유해 볼 수 있다.도장을 맡은 의회가 ‘메뉴’를 결정하는 곳이라면,행정부는 ‘요리’를 하는 곳이다.그러나 지난 세월 우리의 국회는 새로운 메뉴를 짜내는 능력이 없어 요리사에게 통째로 맡기듯 관료에 의존해 왔다.그러고 나서는 요리사에게 일임해야 할 화덕과 양념에 대해 이런 저런 자질구레한 주문을 늘어놓았던 것이다.
정부의 내부로 들어가 보아도 마찬가지이다.정치가 행정을 지도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장관들이 소관부처를 영도하는 것이다.지도자로서의 장관은 자신이 담당하는 부처의 관료를 대표하고 대변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장관은 관료를 개조하고 부림으로써 사명과 정책을 실천하기 위해 존재하는 정치가이다.그러나 역대 장관 중에는 관료의 연장선상에서 문제를 인식하고,자진하여 관료의 대변인이 됨으로써 관료정치를 횡행하게 했던 사람이 많았다.관료들이 정치가를 부리는 나라를 장관들이 앞장서서 만들었던 것이다.
관료정치가 횡행하면 국민의 정치는 형해화(形骸化)되고 시민이 설 자리도 그만큼 좁아진다.지난 세월동안 우리 나라에서 정치의 정책 생산체제가 약했기 때문에 정치가는 관료에게 의존하게 되었다.그리고 장관에게 지혜와 경륜이 없었으므로 오히려 관료가 장관을 지도하는 것을 우리는 수없이 목격했다.장관들의 국회 답변 내용과 수준이 관료의 작문 수준에 달려 있었던 것도 이런 연유때문이었다.
아무리 유능하다고 할지라도 관료들은 국민과 국익을 대표하기보다는 부처의 이익을 대변하기가 쉽다.설령 국익을 대변한다 해도 그것은 부처의 이익이 허용하는 범위 내로 한정되는 경우가 많다.따라서 관료들이 그들의 편익 증대를 위한 조직 내부의 목적에 눈을 맞추는 만큼 국민의 이익을 외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장관들은 명심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부의 기능을 ‘배의 조타수’에 비유했다.정부의 기능을 조타수(操舵手)에 비유한 것은 정부가 ‘파일럿’의 소임을 수행해야 한다는 뜻이다.파일럿이란 큰배가 항구에 들어 갈 때나 나올 때에 길을 열어주는 도선사(導船士)를 말한다.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로 본다면 지금 우리 국민이 겪는 고통은 정부가 조타수로서의 기능을 다하게 하지 못한 정치력의 부재에서 기인한다.그리고 공무원이 부처이기주의에 빠져 있다면 그것은 장관이 조타수로서의 기능을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강형기 충북대 교수·한국지방자치학회 명예회장 ˝
2004-07-03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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