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영의 의(醫)심전심] 69시간 대 88시간/서울아산병원 종양내과 교수

[김선영의 의(醫)심전심] 69시간 대 88시간/서울아산병원 종양내과 교수

입력 2023-03-24 02:05
수정 2023-03-24 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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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영 서울아산병원 종양내과 교수
김선영 서울아산병원 종양내과 교수
‘주69시간 근무제’로 대표되는 정부의 새 노동정책은 양대 노총은 물론 MZ세대로부터도 외면받았지만, 전공의들은 이 정책을 반겼다. 대한전공의협의회는 최근 “88시간을 69시간제로 바꾸는 것에 적극 찬성한다”고 밝혔는데, 실제 일반근로자들의 법정근로시간 한도인 52시간도 잘 지켜지지 않는 것처럼 전공의특별법에 근거한 88시간도 잘 지켜지지 않는다. 올 초 설문조사에서 전공의들의 약 50%는 여전히 법정근로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일했다고 보고했다.

전공의법이 아니라 근로기준법을 적용받는 필자도 주52시간 넘게 일하고 연차를 다 쓰지도 못한다. 40대 후반 전문직도 이러하니 젊은 근로자들이야 오죽하겠는가. 사실 대한민국은 과로하지 않으면 게으름을 피우는 것 같은 죄책감과 자격지심에서 벗어나기 힘든 곳이다. 69시간 근무제는 탄력적 운용을 위한 제도라지만, 과로가 미덕이고 권장되는 사회에서는 사업주 맘대로 노동시간을 늘릴 수도 있는 꼼수로 이용될 가능성이 높다.

오래 일하는 나라에선 일의 양을 늘리기보다는 질을 향상시키는 것, 즉 생산성을 높이는 것이 더 시급하지 않을까? 물론 쉽지는 않다. 그러나 우리가 오래 일한 만큼의 가치를 생산해 내고 있느냐를 생각해 보면 자신 있게 답하기는 어렵다.

의료산업을 예로 들어 보자. 주88시간 일하는 전공의들이 주로 종사하는 입원 환자 진료는 비효율로 점철된 우리 의료의 대표적 단면이다. 입원 병상 수와 입원 치료 기간은 우리나라가 OECD 국가 중 최고로 높은 수준이나, 입원을 많이 더 오래 한다고 건강해지지 않는다. 주치의 제도가 없어 제대로 관리되지 않은 고혈압과 당뇨는 심근경색, 뇌졸중, 급성신부전 등의 합병증을 일으켜 입원 환자를 양산한다. 지역사회의 돌봄 제공이 어렵고 왕진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에서 방치된 만성질환 환자들의 종착역은 응급실을 통한 입원이다. 호스피스 돌봄을 제때 받지 못하고 끝없이 항암치료를 받는 암환자들 역시 응급실과 중환자실을 전전한다.

입원 진료는 외래나 환자교육 등의 예방 서비스보다 더 많은 비용이 들어간다. 특히 전공의와 간호사들의 건강을 위협하는 야간노동이 투입돼야 한다. 이는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치는 작업이지 소를 키우는 일이 아니다. 대형종합병원 중심의 의료서비스 제공 체계는 많은 수의 환자를 진료하며 효율적으로 보이지만, 큰 병원까지 오기 전 단계에서 입원하지 않도록 예방하는 의료서비스는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않다. 개원가는 미용과 다이어트로 점철된 지 오래이고, 중소 규모 병원들은 사라지고 있다. 이런 구조 속에서 입원 환자들은 고령화와 함께 더 늘어난다. 더 많은 전공의들을 더 오래 갈아 넣어야 이 시스템이 운영될 것이다. 지속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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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적으로 의료전달체계와 예방 서비스를 강화해 입원 의료를 줄여야 생산성을 높이고 전공의들의 주88시간 근로도 줄일 수 있다. 주당 근로시간 제한을 52시간에서 69시간으로 늘린다고 생산성이 더 올라갈지는 의문이다. 그보다는 좀더 거시적 관점에서 낮은 노동생산성의 원인을 분석하고, 이에 근거한 정책이 제시되기를 기대한다.
2023-03-24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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