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욱 월드포커스] 루시안 파이를 알면 김정일이 보인다/ 서울대 국제대학원 초빙교수

[정종욱 월드포커스] 루시안 파이를 알면 김정일이 보인다/ 서울대 국제대학원 초빙교수

입력 2008-09-17 00:00
수정 2008-09-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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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과 루시안 파이(Lucien Pye). 한 사람은 우리에게 너무 잘 알려져 있지만 다른 한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 뇌수술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김정일에 관한 기사들이 지난주 국내외 언론을 가득 채우고 있을 때 오랫동안 폐렴으로 고생하던 루시안 파이는 미국 보스턴의 한 병원에서 87세를 일기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한국 언론에는 그의 사망에 관한 기사가 한 줄도 보도되지 못한 채 말이다. 얼핏 두 사람은 아무 관계가 없어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파이를 알면 김정일 이후의 북한을 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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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욱 전 서울대 교수ㆍ외교안보 수석
정종욱 전 서울대 교수ㆍ외교안보 수석


파이는 미 매사추세츠 공대(MIT)에 정치학과를 만들고 무려 51년 동안이나 교수로 재직했다. 정치학을 정신분석학에 접목시킨 그의 정치문화론 강의는 언제나 수강생들로 넘쳐났다. 그의 강의를 듣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온 사람들도 적지 않을 정도였다.

부친이 선교사였던 파이는 중국 공산당이 창당되던 1921년 10월 서북 산시(陝西) 성의 한 벽촌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미국으로 건너와서 학교를 다녔지만 결국 중국 전문가가 됐다. 공산 중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오쩌둥을 알아야 하고 마오를 푸는 열쇠는 중국의 문화를 해독하는 것이라 믿었던 그는 중국 정치문화론의 대가가 되고 말았다.

파이가 보는 중국 정치문화의 핵심은 절대권력이다. 통치자는 하늘이 보낸 천자(天子)이고 통치의 대상은 땅의 사람들인 토자(土子)이다. 절대권력을 가진 천자와 그러지 못한 토자의 차이는 바로 하늘과 땅 차이다. 그 차이를 메울 중용의 묘책은 존재하지 않는다. 땅은 하늘을 떠받치지만 동시에 하늘이 무너지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하늘이 무너지면 솟아날 구멍이 없다. 절대권력이 흔들리면 천하태평이 천하대란으로 돌변하고 만다. 파이가 보는 중국의 문화혁명이 바로 이런 것이다. 마오는 자신의 권력이 도전받고 흔들리자 홍위병들을 동원했지만 천하대란이 생겨 자신도 홍위병과 함께 몰락하고 말았다. 대란이 끝나면 태평의 시대가 올 것이라는 마오의 믿음은 절대권력에 대한 그의 집념 때문에 결국 일장춘몽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파이의 이론은 북한에도 적용될 수 있다. 김정일의 지위는 마오보다 훨씬 더 절대적이다. 그는 주체 왕국의 수령이다. 수령은 하늘이 내리는 사람이다. 땅의 사람은 수령이 될 수 없다. 수령은 땅에서 나지 않는다. 하늘이 내린다. 김정일의 뒤를 이을 사람도 하늘에서 내려야 한다. 하늘에서 내리는 절대자가 그 권력을 행사하지 못할 경우에는 수렴청정이라는 최후의 수단이 동원되어도 하늘과 땅의 차이는 지켜져야 한다. 그 차이를 지키기 위해 중국의 서태후(西太后)가 북한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 마오의 장칭(江靑)이나 마오원신(毛遠新)이나 장위펑(張玉鳳)이 북한에서는 누구일지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수령론의 뿌리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게 북한이 자랑하는 유일체제의 특징이자 한계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대응은 냉정해야 한다. 북한에서 김정일 후기 체제의 등장은 천하대란으로 이어질 수도 있지만 성급한 결론은 금물이다. 아직 김정일은 천자로 군림하고 있다. 통치가 군림으로 바뀌어도 천하대란은 오지 않는다. 하늘과 땅 사이의 차이가 커져도 당장 하늘이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다.

적어도 중국이 무너지지 않는 한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중국에 북한이 무엇인가를 우리는 너무나도 우리 위주로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북한의 천하대란이 우리에게는 머지않아 천하태평의 시대를 열어줄 것이라는 안이한 생각은 버려야 한다. 북한의 천하대란은 한반도 주위에서도 실로 엄청나게 복잡한 상황을 초래할 수 있다. 북한에 대한 관심만큼이나 주변의 움직임을 면밀히 살피면서 차분한 대책을 세워 나가야 역사의 죄인이 되지 않는 길이다.

서울대 국제대학원 초빙교수
2008-09-17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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