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봉은 주자가 직접 해설한 ‘이는 해당되지 않은 곳도 없고, 이가 없는 사물은 하나라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그 작용은 실제로 사람의 마음을 벗어나지 않는다.’라는 주를 통하여 ‘이(理)를 사람의 마음에서 벗어나 있는 죽은 물건, 즉 사물(死物)’로 보고 있는 퇴계의 오류를 통렬히 비판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70세의 노학자 퇴계가 죽기 불과 2달 전에 행한 고봉의 지적에 ‘비로소 자신의 견해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두려워지기 시작’하였다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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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떤 학자나 사상가도 자신이 평생 동안 연구하여 정립한 학문에 설혹 오류가 있다 하더라도 이를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일이며, 특히 후학으로부터 지적을 받으면 인격적인 모독으로까지 간주하기 마련인데, 퇴계는 놀랍게도 고봉의 지적을 받은 순간 10월15일자 편지에 쓴 내용처럼 ‘…이에 옛 견해는 남김없이 다 씻어버리고 마음을 비우고 주의를 기울여 먼저 이(理)가 스스로 이를 수 있는 까닭(자신은 사람을 떠난 이를 죽은 물건으로 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기 시작’하였다는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 퇴계는 자신의 견해가 완전히 오류였음을 인정한다.
이에 대해 퇴계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저도 항상 주자의 말씀을 뜻이 깊다고 보고는 있었습니다만 이를 분명히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퇴계는 70평생 동안 지켜온 자신의 ‘격물치지’에 관한 해석을 다음과 같이 수정하고 있다.
“주자가 ‘이는 세상만물에 있지만 그 작용은 실로 한사람의 마음을 벗어나지 않는다.’라고 하신 말씀을 보면 분명히 이는 스스로 작용하지 못하니 반드시 사람의 마음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다면 이가 스스로 이른다고 말할 수 없을 듯합니다. 그러나 ‘이에는 반드시 작용이 있으니, 어째서 그것을 다시 마음의 작용이라고 말해야만 하겠는가.’라는 (주자의) 말을 보면 이의 작용이 비록 사람의 마음에서 벗어나지 않으나, 작용의 미묘함이라는 것은 실제로 이가 드러나 사람의 마음이 이르는 데를 따라 이르지 못하는 곳이 없고, 다하지 못하는 것이 없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 우리는 다만 우리가 ‘사물의 이를 완전히 파악하는가(格物)’를 걱정할 뿐 이가 스스로 이르지 못할까 근심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퇴계는 마침내 격물치지에 관한 자신의 학설을 다음과 같이 과감하게 수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야흐로 ‘사물의 이치에 이른다.(物格)’라고 말하는 것은 참으로 내가 사물의 궁극적 이치에 완전히 이르렀음을 말하는 것이고, 사물의 이치에 이르렀다고 말하는 데에 이른다면 어찌 내가 완전히 이름에 따라 사물의 궁극적 이치 또한 같이 이르게 된다고 말하지 못하겠습니까. 여기서 감정이나 의지가 없고 짓고 만들지 않는 것이 이의 본연의 실체이며, 각각의 경우에 보는 정도에 따라 또한 같이 이르게 되는 것이 이(理)의 지극히 심오한 작용임을 알겠습니다.”
2006-08-31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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